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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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2582] 희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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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11 ㅣ No.2583

주님의 평화!  

 

희년에 대하여 질문을 하셨는데 다음의 해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희년이란 ’기쁜 해’라는 말인데, 주님의 은총의 해이며, "죄와 그에 따르는 벌을 사해주는 용서의 해, 대립된 집단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는 화해의 해, 다양한 회개와 성사적, 성사 외적 참회의 해"(제삼천년기 14항)이다.

 

희년에 대한 규정이나 의미는 레위기 25장에 상세하게 나온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안식일, 안식년 등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창세기의 창조설화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는 쉬신 것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6일 동안 일하고 7일째 되는 날은 하느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쉬어야하는데, 이날이 바로 안식일이다.

 

이와 비슷하게 6년 동안 땅을 경작해서 소출을 낸 다음 7년째 되는 해에는 땅을 경작하지 않도록 되어 있는데, 이 해를 안식년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이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다음에 맞이하게 되는 해 그러니까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한다.

 

 

참고적으로, 혼인이나 사제의 서품을 경축하는 데에 금혼식(금경축), 은혼식(은경축)을 꼽는데, 이 금혼식이 바로 희년에서 온 것이다. 50년을 함께 산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해서 모든 미움이나,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들, 또는 섭섭한 것들을 모두 풀고 기쁜 마음으로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50년의 반을 축하하는 은혼식은 작은 금혼식인 셈이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처럼, 안식년에도 땅을 경작할 수 없다.  이 안식년에는 종들이나 떠돌이 등 가난한 사람들이 그 땅의 소출을 거두어드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규정이었다.  그 대신 안식년 전 해 즉 6년째 되는 해에는 소출이 많아서 안식년 동안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축복을 내린다는 약속이 되어있다.

 

레위기 25장에 의하면, 매 50년마다 맞이하게 되는 희년에도 소출을 거둘 수가 없는데, 이 때에도 역시 48년째 되는 해에 3년간 먹을 수 있는 소출을 거두게 되어서 다음 해인 일곱 번째 안식년과 그 다음 해인 희년에 소출을 거두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희년은 글자 그대로 기쁜 해이다.  그래서 기쁨을 만드는 해이고 기쁨을 주는 해이다.  희년에는 모든 채무관계를 정리해서 빚을 탕감해 주도록 되어있다.  빚 뿐만 아니고 구입한 땅도 희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되어있다.

 

다시 말해서 희년은 모든 채무자들을 해방하는 해이다.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는 땅이 원래 사람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년은 해방의 해이기 때문에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지내야 한다.

 

 

희년은 분명히 기쁜 해이다.  기뻐도 그냥 평범하게 좋은 일이 있어서 기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축복을 모든 사람이 받고 나눈다는 의미에서 기쁜 해이다.  그런데 세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선 제일 가까이 있는 지난 번 희년은 1950년이었다.  그런데 그 해에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이 땅의 가장 끔찍한 사건인 6.25 한국동란이 있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나라에는 희년의 축복을 주시지 않았던 것일까?  한국동란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면 희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느님의 축복은 당연히 함께 하시겠지만 기쁨의 해, 해방의 해를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옛 말씀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고 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강제로 올바른 길로 끌고 가지 않으시듯이 축복도 강제로 내리시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축복은 받을만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햇빛이 밝게 빛나도 두꺼운 커튼을 드리우고 있으면 집안이 어두운 것과 같다.

 

그런데,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금년, 우리의 모습을 보면 어떤가?  한 편에서는 높은 부인들이 수천만 원씩 하는 옷들을 사 입고 다닌다고 하고 - 실제로 사 입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비싼 옷을 파는 가게에 가는 것만으로도 서민들은 혀를 내두를 일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 다른 한 편에서는 직장을 잃으면 생계에 위협을 받는 서민들과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하기 위해서 각본을 만들었다고 하고, 게다가 그런 사실들을 ’모른다?’기억나지 않는다?’아는 바 없다’ 는 등으로 은폐하려고만 한다.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국회의원들이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서 청문회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중요한 자료들을 공개하지 않으니 확인할 수조차 없다.  이런 상황이 그렇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시 슬픈 희년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나라 교회는 대희년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묵주기도 1억 단 봉헌을 목표로 세우는 등 열심히 기도하도록 권유하고 있고, 또 많은 교우들이 그를 열심히 따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희년의 정신이 해방에 있고 보면, 우리는 해방을 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요즘같이 살기 힘든 세상에 어렵사리 꾸어준 돈을 몽땅 탕감해 주면 나도 당장 먹고살 일이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꾸어주는 편이 꾸어야만 하는 사람보다는 형편이 나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어느 만큼은 탕감해 줄 마음도 가질 만하다.

 

성서의 말씀대로 땅 자체가 원래 내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좋은 두뇌, 건강이나 권력도 원래는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또한 금전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탕감해 줄 일은 많다.  나에게 잘못을 저질러서 원수처럼 미워하고 있던 사람에게 용서를 베푸는 것도 마음의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이다.  그런데, 용서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보면 용서를 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우리는 용서할 지혜와 힘을 주님께 청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내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에게 해방을 주는 것뿐만이 아니고, 나 자신도 미움과 고통이라는 쇠사슬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용서와 화해는 서로를 해방시키는 아주 중요한 열쇠인 셈이다.  교회도 냉담자나 조당자들을 속 시원히 용서하는 제도를 만들어서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하느님의 품으로 따뜻이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서로가 용서하고 화해하고 그래서 다시 한데 어우러져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문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희년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희년은 기쁜 해이지만, 우리가 그 기쁨을 만들어 가도록 노력해야 하는 해이다.  그럴 때 하느님의 축복에 힘입어 대희년을 참으로 기쁘고 은총 가득한 희년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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