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신앙상담 신앙상담 게시판은 비공개 게시판으로 닉네임을 사용실 수 있습니다. 댓글의 경우는 실명이 표기됩니다.

q [RE:551] 요한 8,11

인쇄

비공개 []

2000-05-08 ㅣ No.553

 

1. 그 친구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십시요. 어떤 죄든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용서해줄 준비가 되어있는 분입니다. 단 하나의 조건은 우리가 그 용서를 받아들여 행동을 고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8장의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친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겠습니다. 가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요한 8,11).

아마도 그 친구는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감, 절망감 때문에 자포자기해서 더 죄에 빠져들어가는 것 같네요.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사람만이 잘못된 행동을 고치려는 결단을 할 수 있고, 그에 따르는 고통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에게서 가장 큰 잘못은 자포자기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번 배반했고, 가롯 유다도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베드로는 자포자기 하지 않았기에 구원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유다는 자포자기해서 자살을 택했습니다. 유다에게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자포자기한 것이 스승을 배반한 것보다 더 큰 죄입니다(<신비를 만나는 사람들>, 생활성서사 26-33쪽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친구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을 심어주시고, 그를 바탕으로 잘못된 행동을 고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구체적인 방책을 제안합니다. 우선 친구로 하여금 신뢰할 수 있는 신부님을 찾아가서 상담겸 고해성사를 볼 수 있도록 주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신부님이 계신 본당에 나가지 말고 다른 본당에 가서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십시요. 적어도 6개월 내지 일년만 그 신부님과 연락을 끊고 산다면, 헤어나올 수 있는 길이 보일 것입니다. 물론 처음 얼마간은 괴롭고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괴로움을 가벼워집니다. 사람은 안 보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서양 속담은 정말 맞는 말이고 삶의 체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2. 친구와 잘못된 관계 속에 있는 신부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친구도 동의했기에 그런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일방적으로 신부님만을 탓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친구에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다고 봅니다. 이 부분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신부님의 책임이 더 중하다고 봅니다. 신자들의 지도자로서 신자들을 올바로 인도하지 못하고, 가정까지 위태롭게 만든 잘못, 중대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책임 추궁을 받는다면 더 엄하게 받겠지요. 많은 받은 사람은 많이 내 놓아야 하고, 그래서 더 크게 야단 맞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 한 사제로서 그 신부님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그러지 이성과 양심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감정과 욕망은 그와 반대되는 것을 강요하는 가운데 매일 매일 힘겨운 투쟁의 삶을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외에 누구도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신부님의 내면의 갈등과 투쟁, 고통을 누가 알겠습니까?

예전에는 신부님의 독신 생활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텔레비젼과 잡지, 광고에는 성적 이미지가 자극적으로 사용되고, 사회 전체가 성적인 자유를 내세우면서 성에 대한 것이 넘쳐 흐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제가 독신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힘겨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자들이 많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한 잘못한 이에게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시는 예수님을 따라서 신자들도 잘못한 사제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아래의 글 ’마음을 무겁게 하는 질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미운 생각이 들더라도 그 신부님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신부님 역시 최고의 목자인 예수님의 양떼에 속하는 사람이고, 선과 악을 동시에 행하는 약한 사람이고, 그래서 구원되어야 할 죄인이며, 자비와 용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 신부님이 밉거든, 십자가 위해서 자신을 못박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주십시요.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모쪼록 자매님도 그 신부님께 대한 미움을 누그러트리고, 본의 아닌 냉담 생활을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자매님이 받은 충격과 마음의 상처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 때문에’ 성당 안 나간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입니다! 세상의 악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는다, 세상의 미움과 불신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충실을 믿는다 는 신앙입니다.

 

3. 552 번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저도 이런 공개적인 데에 사제의 성적인 잘못에 대한 내용의 글이 올라온다는 것에 대해서 우려하는 마음이 큽니다. 어느 사회든 잘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부 사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잘못이 공개화됨으로써 그 사람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 전체가 수상쩍게 보여질 수 있습니다. 십여년 전에 어떤 신부(나중에 추기경까지 됨)와 여인의 애정 관계를 주제로 한 외국 드라마 ’가시나무 새’가 텔레비젼에 방영되자, 일부 사람들은 마치 모든 신부님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고 합니다. 이런 공개적인 데에서 이런 문제가 논의 됨으로써 이 비슷한 일이 벌어질까 두렵습니다.

사람에 대한 신뢰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사회와 같이 신뢰심이 점점 더 없어지는 사회에서는 신뢰의 소중함이 훨씬 더 큽니다. 천주교 신부에 대한 일반인의 신뢰는 아주 큽니다. 그것이 깨지지 않도록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신부님들이 열심히 노력해야겠지요. 자신에게 주어지는 신자들의 신뢰가 정말 소중하고 값지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그것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신뢰에 응답하지 못하고, 그것을 남용하는 사제가 종종 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 적합한 방식으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여성 문제와 관련해서는 세심하고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믿을 만한 신부님을 찾아가거나, 그 신부님의 동창을 찾아가서 상의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요

 

자매님께서 기왕에 이런 데에다 글을 올린만큼 책임 의식을 갖고 친구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가정이 깨지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추신: 친구가 면담과 고해성사를 원한다면, 도와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저는 위에 인용된 책의 저자입니다).



424 0댓글쓰기

신고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