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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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397]신앙체험, 사적계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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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1-16 ㅣ No.399

안녕하십니까?

 

다시 글을 올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다시 몇자 적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면 그것을 내 놓아야 속이 시원한 성격이라서...

 

우선 논쟁으로 빠질 수 있는 주제였는데, 다행스럽게 서로의 입장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가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제가 말씀 드린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의견을 제시하신 것이 "겸손하지 못한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할 말이 있는데 혹시 사제의 심기를 상할까 해서 그냥 침묵해버리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는 평신도들도 신앙에 관해서 자신의 의견과 확신을 흥분하지 않고 적합한 말로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저번 글을 올리고 나서 더 보충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었습니다. 신앙과 신앙 체험에 관한 저의 생각입니다. 적지 않은 신자들은 피정이나 혹은 다른 여러 기회를 통해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뜨거운 감동을 느끼고(루가 24,32), 그래서 옛 사람의 껍질을 벗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체험을 합니다. 이런 체험은 분명히 하느님의 은혜이고, 살아 있는 신앙 생활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그런 신앙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느끼고 확신하게 되지요. 이런 신앙 체험이 있으면 활력있고 기쁘게 시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적지 않은 신자들은 이런 신앙 체험이 없기 때문에 신앙을 따분하게, 무거운 짐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신앙 체험은 지나가 버립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고 너무 황홀해서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무르고 싶어 했지만, 결국 그 순간은 지나가버린 것처럼 말입니다(마태 17,1-8).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그런 뜨거운 체험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려고 발버둥치기도 합니다만, 잘 되지 않습니다. 님께서도 저번 글에서 나주에 갈 때에는 신앙이 불붙지만 조금 지나면 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고 하셨지요. 그런 것은 님만이 아니라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겪는 것입니다.

 

뜨거운 신앙 체험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머무르지 않고 지나갑니다. 그 다음은 다시 별다른 느낌도, 크게 달라짐도 없이 덤덤한 일상의 삶이 계속될 뿐입니다. 어쩌면 이런 무미건조한 일상의 삶을 견디어 나가게 하기 위해서 가끔씩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 보시기에) 필요한 때에 뜨거운 신앙 체험이 주어지는가 봅니다. 따분한 일상 생활에 휴식과 활력을 주기 위해서 가끔씩 휴일이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뜨거운 신앙 체험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신앙 생활이 마치 뜨거운 신앙 체험이 연속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신앙 생활이 아닌가 하면 자신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가끔씩 주시는 뜨거운 신앙 체험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찾아오는 일상의 무미건조함, 따분함을 묵묵히 견디어 나가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가 아닐까요? 성인들도 예외없이 이런 과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대 데레사 성녀는 십수년 동안 하느님 체험 없이, 마치 사막을 걷는 것 같이 살아야 했답니다.

 

"회개와 죄지음이 반복된 생활, 뜨겁게 타오르다가도 미지근해지는 신앙" 때문에 무엇인가를 갈망한다고 하셨지요? 아마도 그 갈망은 죽은 다음에 하느님을 마주 뵈올 때 완전히 채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안타깝지만, 회개와 죄지음의 생활, 뜨겁다가 다시 식어버리는 우리 자신을 견디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의 신앙인의 삶을 순례의 길에 비유하지 않습니까? 이런 삶의 기본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뜨거움만을 찾아다닌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라고 봅니다.

 

계속 마음의 뜨거움을 지속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적어도 하느님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는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계속적인 영성의 제공"이 필요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성이 제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정통적이고, 확실하고, 안전한 방식이 바로 성서와 성사, 그리고 기도입니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가 2천년의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것입니다. 신약성서에서도 이런 것이 발견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성서의 말씀을 해설해 주실 때 서서히 마음이 뜨거워졌고, 엠마오에 도착해서 빵을 나눌 때(이는 성체성사를 의미합니다) 눈이 열려서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이는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한 것을 뜻합니다). 성서와 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체험한 것이지요.

 

님께서는 나주 성모님의 영성에 애착를 갖는다고 얘기하셨지요? 물론 나주에서 중요한 신앙 체험을 하셨기에, 그러하시겠지요. 하지만 나주 성모님의 영성이 교회에서 얘기하는 성모님의 영성과 과연 크게 다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나주에서 설사 성모 발현이 있었다해도 그 성모님은 다른 성모님이 아니라 성서에 나타난 성모님이고 가톨릭 교회가 2천년 동안 공경해 온 성모님입니다. 그러므로 서울, 광주, 대구, 수원, 부산, 인천의 어느 성당에서 공경하는 성모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꼭 나주를 통해서만 "외면 받으신 성모님께 대한 효"를 실천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성모님께 효를 실천하는 것은 좋지요. 하지만 그분은 교회의 어머니인 만큼 교회가 인정하는 방법으로 한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나주에서의 일이 설사 사적 계시라고 하더라도, 사적 계시는 공적 계시를 보충하거나, 공적 계시에 없는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적 계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직접 증언한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더불어 종결되었습니다. 이런 공적 계시는 성령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보존되고 재현되어 온 시대의 만인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면 사적 계시는 공적 계시의 내용의 일부분을 그 시대에 맞게 강조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사적 계시 없이도 신앙 생활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참조 삼아서 1997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신앙교리 위원회에서 발표한 <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이라는 발표문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순간에 특수한 방법으로 ’사적계시’를 통해 개입하시지만, 그것은 ’공적계시’의 내용을 더욱 깊게 이해하고 살도록 하려는 것이다. ’사적계시’는 특수한 전달 방법으로 드문 방법이며, ’공적계시’의 내용을 더욱 깊게 이해하고 살도록 이끌어주는 좀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방법은 교회의 전례 생활고 성서 묵상 나눔과 설교 듣기 등이다"(9-10쪽). 바로 이런 이유에서 제가 성서와 성사, 기도를 누누히 강조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의 신앙은 교회와 함께 할 때 빗나가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는 가톨릭 교회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영성가, 개혁가들의 삶에 잘 드러납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예수회의 창설자 이냐시오 성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큰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교도권에 대한 순명이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2천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부침을 경험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타락과 부패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다시 하느님의 은총으로 본래의 길에 접어들어서 본연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많고 다양한 경험을 축척한 신앙 공동체로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얘기하고 가르침을 주기도 합니다. 인간 삶에서도 세상사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모두 체험하고서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이 하는 말에 큰 신뢰를 두지요. 저는 이런 경험 많은 현자의 모습을 우리 가톨릭 교회에서 봅니다. 모쪼록 교회에서 통상적으로 제시하는 "영성의 제공"에 관심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 영성이 처음엔 좀 따분하더라도 결국에는 영적 갈증을 가장 많이 가라 앉혀줄 것입니다. 마치 똑 쏘는 맛의 콜라나 사이다 보다는 별 맛 없는 물이 갈증을 더 잘 달래주듯이 말입니다.

 

이젠 그만 종지부를 찍어야겠습니다. 저로서도 할 말은 다 한 것 같습니다. 서로의 입장 차이가 여전히 남아 있겠지만, 그래도 건설적인 대화였기를 바랍니다.

 

저의 대한 축원과 기원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신자들은 어떤 견해와 입장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더라도, 하느님께 기도하고 서로를 위해 축복을 빌어주는 데에서 일치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끝내면서 건낸 인사말로 저의 글을 마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2고린 13,13).

 

                                신학교에서 주일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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