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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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죽고나서 부활 후에 갖게 되는 능력과 사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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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220.72.245.*]

2016-09-17 ㅣ No.11264

비공개님의 질문은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성경 공부가 취약한 가톨릭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답과 유사한 질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미카엘 천사급으로 격하시키지요. 성경에서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찾아보라고 하고 성경을 자신들의 교의적,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매우 부드럽게 강권하곤 합니다. 그 옆의 또 한 사람은 조용히 기도하며 답변자를 유도하곤 하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개신교 특성상 북한 삼대 세습자들처럼 골수(?) 신자들만 남기고 즉결 숙정을 자행하기 때문이지요.

 

언젠가 필자에게도 '여호와의 증인' 교회 두 사람이 나타나 사도 바오로 예를 들면서 칭찬요법을 병행, 계속 참모급 동행으로 나타나 천주교회를 깍아내리기에 당신들은 성경 첨병 역할을 하고 우리는 상호 협조자로서 인식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 강변한 적이 있는데 나중 그들은 길위에서 인사했지만 눈길도 안주더군요. 역시 성경 지침대로 무시작전으로 임한듯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활합니다. 가장 버림받은 영원한 죽음에 떨어진 영혼에게도 당연히 기도할 권리가 주어집니다. 인디언 속담에 선한 늑대 악한 늑대의 승패는 내가 먹이 준 쪽이 이긴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문제는 알게 모르게 고통 한가운데 있을 때 너와 나의 관계가 더욱 손상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때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영접하는 나의 생각도 침묵함은 웅변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영원무궁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올바로 믿고 싶다면 때때로 섞갈리는 그 모든 것들은 주님 제대에 올려놓도록 해보세요. 그러면 일반 천사가 아닌 하느님의 권세, 하느님의 치유, 하느님의 일을 전하는 가브리엘, 라파엘, 미카엘 대천사도 만나게 될 것이고 누가 아무리 마음 상하게 하더라도 곧 그가 대천사의 전구로 임하는 천사임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을 복기하는 공부생활도 일단 기어로 그냥 하느님과 소통하게 되는 기도생활도 조금 더 생활화 되겠지요.

 

천사와 사람은 죄에 빠질 수 있기에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순수한 어린아이 사고를 닮아있기도 하지요. 생각과 말과 행위 또환 본시 하나로 이어져 있기에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지나 길을 지나다 이미 들어본 노래도 이미 불러본 노래임을 깨달아 자기무시가 아닌 작가무시가 아닌 청중 무시가 아닌 삼위일체로 노래하는 자신을 보기도 할 것입니다. 이는 지복직관의 첩경이라 할 수 있는데 사람이 염치 없이도 그 분의 제단 또는 생활 속 벤치위에 순간들의 나를 모두 올려놓고 대중과 노래할 때 때때로 찾아드는 자아도취와 분심들도 다만 올려놓음으로서 보다 안정되고 진취적인 박자, 음정, 발성을 만나게 되는 것도 주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수들은 대중의 고정관념과 달리 노이펙(기도 환경)으로 녹음하고 이펙(세상 환경)으로 더빙하지요.

 

최근 자살한 유명 야구인은 개인적으로 필자 고등학교 체육교사였습니다. 필자는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를 저주해야 했습니다. 어느날 운동장에서 처음 그와 상면한 날 비오는 날 먼지 털리듯 필자를 때리고 또 때리는 그의 폭령성에 혀를 내둘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필자는 평상시 교복이었다면 같은 희성인 河家를 보고 이처럼 때리지 않았을텐데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필자의 맞을짓은 당시 가장 선하게 다가온 물리 선생님께 어영부영 자의적 허락으로 체육실 축구공을 꺼냈다가 허락없이 그것을 빼냈다는 징벌이었습니다. 바보같이 그것을 변론 못한 내 탓이기도 합니다.

 

그는 죽을 때 제일 먼저 배반하는 돈과 명예에 생명을 담보해야 했습니다. 제자였던 사랑하는 이혼 아내에게 문자도 보내지 못하고 그렇게 먼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고통으로 인해 누구보다 더 하느님께 의탁하려고 노력했겠으나 결정적으로 그 아픔를 피할수 없다면 받아들임으로 임하는 밧데리 충전이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닥을 찬다는 것은 가장 큰 기쁨입니다. 사랑도 헤어졌을 때부터 더 큰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인본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고통이라는 것 그보다 더 큰 은사는 없음입니다. 고통중에 기도하긴 힘들지만 자고나면 그 고통 반감되는 것 또한 신비입니다. 

 

프로는 솔로인 것입니다. 고통과 기쁨 하나된 사람들은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관세음 또는 성모마리아 향기를 전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인 특유의 머리와 가슴 살아 숨쉬는 현장에서 더욱 가까이 바라보이게 됩니다. 사채업자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는 그의 아픔을 필자로선 공감하기 힘들었고 "당신이 하는일이 그렇치"라며 조소를 보내는 필자는 그를 두 번 죽인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벙어리가 됩니다. 흥청망청 퇴폐, 향락을 조장하던 네티즌들도 사이버 장례 공간에서는 평소의 군중들과 같으나 다른 예와 아니오 자체를 묻어버리고 그렇게 숙연해집니다. 이 모든 것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어주시는 분은 창조주 한 분 뿐이시며 이에 생각과 말과 행위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다가가 그분을 향유하게 됩니다.

 

따라서 죽은 후의 세계는 더 이상 성경을 읽을 일도 없다는 것은 숙제 안해 온 학생이 숙제없는 세상으로 졸업하길 바라는 마음과 같고 일제시대 민중들이 일제 압제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과 같을 수 있음입니다. 현실은 어떠한가요? 내가 화나면 하느님도 화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화내셔도 내가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중년 부부들은 무색무취의 물같은 사랑을 향유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 크고 작은 삶과 죽음인 것이지요. 비공개님의 질문 역시 보다 범위를 넓게 바라보게 해주시는 하느님 안목에서 전혀 틀린 이야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신 사도행전을 써 내려가기 위해서 자신를 더욱 즐겨 조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지요.

 

신성법은 공짜입니다. 그러나 인정법은 공짜가 될 수 없습니다. 유무상통이 또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본능에 의거하는 삶은 목자 잃은 양 되기 쉽상입니다. 비공개님의 지론은 자칫 구천를 맴도는 영혼들에게 정채하여 제사 지내는 한국 남자들과 여인들의 아픔 방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의탁한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 제사 즉 미사가 됩니다. 생활 속의 준 성사생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뻔스럽더라도 하느님의 그것을 속단하려는 동물적 본능을 경계하며 다만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처럼 가장 높은 제단 위에 그것을 무조건 내려놓고 사람들과 나눔으로서 커지는 사랑으로 노래하는 인생또한 즐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는 사람 의식 아닌 하느님 의식 회복으로 또는 장애인 인식개선 효과로 이어져 장애인들을 좀비주의로 대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수시로 붙여달라 하는 자아도취 또한 내려놓기로서 채움받기로 전환하고 익은 벼 더욱 고개 숙이는 겸손 섬김 저축 방안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 다음 부활하면 오늘은 어제와 다른 또 다른 행복으로 신혼부부 이상의 주님 사랑을 향유하게 됨이지요. 그러면 가장 멋진 남자와 가장 아름다운 여자 또한 상호 식별력을 구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느님께서 보내주시고 묵인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기적을 때때로 친구들 앞에서 뿅!(승천), 짠!(부활)등의 너와 나 신뢰 회복으로 임하는 것 기도, 공부는봉사, 성사, 공동체 생활까지 성공으로 향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운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이 땅에서 미리 천국에서 해후, 공유, 준비할 수 있는 신념이 확고해짐으로써 더욱 오늘이 삶과 죽음 하나되는 기쁨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쉬어도 행복하고 일해도 행복해지는 그리스도 향기를 전하는 사람으로 거듭남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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