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5일 (화)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신앙상담 신앙상담 게시판은 비공개 게시판으로 닉네임을 사용실 수 있습니다. 댓글의 경우는 실명이 표기됩니다.

q Re:부끄러운 질문...

인쇄

사랑과 영혼 [61.106.110.*]

2005-05-10 ㅣ No.3426

 

종교란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해석한다고 말씀 들은적이 있지요? 이러한 종교를 내 마음속에 담기는 쉬워도 그것을 계속하여 내 것으로 취하기는 참으로 어렵고도 또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즉 고통을 또다시 내것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 고통은 하느님 최고의 은총임을 믿으며 또한 천국에 진입함에 있어 자연스러운 필연이 고통임을 인식하지 않는 이상 질문하신 그분의 자세로서는 이러한 종교를 취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며 또한 이 분의 말씀데로 종교를 모르면서도 세상속에서 선행을 쌓아가는 선인들과 심지어 암에 걸린 사람들의 직계 가족들의 고통의 동참등은 수박 겉 핧기식의 종교인일 수 있는 우리로 하여금 깊은 반성을 자아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모든 분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믿을수만 있다면야 금상첨화겠지요.

 

그분께 전해 드리십시오(그분을 주님을 모시듯 영접하는 어조로써 성부가 성자께 말씀하시듯 온유하고도 평화롭게 말씀을 전하시면 더욱 좋을듯 합니다. 사실 필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인들은 이러한 사랑의 자세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개미의 삶과 꿀벌의 삶과 거미의 삶을 비유해 드리십시오.

 

개미는 일생을 가족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이웃과 정을 나누는데 한계를 갖는 곤충으로 다만 성실성의 귀감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꿀벌은 개미의 장점은 물론 세상속의 보다 밝은 곳에서 꽃과 나비들에게도 자양분을 나누는 역할로써 우리들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거미는 숲속이나 어두운 곳에 진을 치면서 나약한 존재들을 잡아 먹는 무시 무시한 역할을 보내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종교를 갖지 않았기에 따라서 하느님과의 대화 모뎀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상명하복의 기쁨과 친구(가장 오래된 벗)로서의 진가를 나누고 그것을 행하는데 그만큼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을것입니다.

 

오늘날의 도시의 웰빙 문화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적지 않은 신앙인들이 만유위의 으뜸이신 주님께 먼저 시간을 봉헌하겠노라고 스스로 되뇌이며 또 조금씩 겸손과 용서의 탄창을 장착하여 레제오 크리스티(그리스도의 병사), 또는 레지오 마리애(성모님의 군대)로써 그렇게 살려 할 때 보편 신앙인으로 남아 대충 코리안 타임이나 양산하는 그러한 신자로 머물거나 다만 자신과 가족의 건강만을 염두에 두며 산다면 이들의 구원 역시 스스로 한계를 맞을 수박에 없을 것입니다.

 

성부와 성모님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글자그대로 성스러운 삶과 모범을 실제로 우리에게 피와 살로써 보여주셨기에 최근의 故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도 임종 직전까지 당신의 역할을 대행하시면서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시오''라는 유지를 남겨주시고 그렇게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2005년전 싯점(예수님의 탄생과 서기는 직접 관련이 있지요?)에 희생과 섬김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동호회임을 당당히 밝혀 드리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가톨릭(보편성)은 절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교회법으로 설정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종파도 가톨릭입니다. 그야말로 모래알, 또는 밀알, 겨자씨같은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 또한 가톨릭이기에 우리들의 종교인 가톨릭 교회법상에서는 모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포용하고 맞이할 것을 원칙으로 선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웰빙주의로 머무는 적지 않은 신자들은 본의 아니게 이들을 배타하고 있고 상처받은 이들이 쉬어갈 곳을 제공하기보다는 개미같은 삶에 머무는 경우가 참 많은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미사를 참례하지 못하고 보는 경우요, 미사에 참례하려 하여도 성수로 정화는 하려 하되, 그리스도의 제단을 먼저 바라보지 못하는 작은 무지들을 해매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누가 예수를 모르되 바르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을 예수께서 나 몰라라 하신다 주장하겠습니까? 그것은 본시 천사와 마귀가 한집에 살기에 즉 우리 마음속에 선과 악이 공존할 수 있기에 인간의 자아가 빚어낸 스스로의 졸작에 불과하며 여기서도 장인 정신을 가진 도공의 마음은 여지없이 그 진흙을 뭉게고 즐겨 새로운 그릇을 빚어낼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 사랑과 영혼이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지도 모를 일이며 이들이 20세기 최고의 연인으로 범 보편인들에게 회자되기도 하였을 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 예수님 사랑을 기억하는 신앙인들은 이 연인들이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묵상할 수 있으며 결국 질문자의 그것은 흑백논리 이전의 그릇의 재료를 함께 준비하는 벗으로 다가오길 기원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행 보증수표론을 거론하기까지 하니 아무튼 그분도 뭔가 실적위주의 성급한 사고가 엿보이는군요. 그러한 질문에 대답을 못함은 분명 가톨릭인으로써의 커다란 은총의 산물일 것입니다.

 

그러고도 스스로 부끄러워 하실 수 있는 님의 달란트 아름다운 일인것이지요.

 

하느님의 사랑을 믿음은 첫 단추일 것입니다.

 

닮음은 두번째 단추요, 실천함은 세번째 단추로 비유할 수 있겠군요.

 

예수님을 가장 따른 제자 베드로조차 예수님을 세번 배반하였고 눈물을 흘렸으며 훗날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듯 이러한 세개의 단추의 진리를 모를 수 있는 질문자 또한 우리에게 또 한사람의 베드로로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에도 내가 사탄처럼 적 그리스도의 역할로 머물 것이냐? 아니면 진짜 주님의 모습으로 다만 그 평화의 도구로써 그에게 복음을 전파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역시 이 또한 주님의 몫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다시 섬기러 오신 주님을 믿고 닮고 따르려는 자세로 그분과 복음을 나누면 나머지는 세상 누구에게나 하느님 모상을 닮을수 밖에 없는 심연속의 주께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존재성을 지금의 ''나''와 ''깊은 나''이신 주님이라고도 고해하고 있습니다.



393 0댓글쓰기

신고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