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7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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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38 박영희 [corenelia] 스크랩 202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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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일 다해] 마태 11,1-13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기도를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로 정의합니다. 대화란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내 뜻을 통보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말하고 또 들으며 상대방의 입장과 뜻을 헤아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헤아린 바를 바탕으로 어떻게 해야 그와 나 사이의 입장 차이를 좁혀 타협에 이를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그와 내가 서로 다른 뜻을 하나로 모아 올바른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을지 그 방안을 모색해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과 대화할 때는 일방적으로 떠들기만 할 뿐 제대로 듣지 않습니다. 그저 기도문을 입으로 외우는 것으로 끝내고, 내 청원과 바람을 하느님 앞에 주욱 나열하는 수준에 그치고 맙니다. 말로는 주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내 욕심을 먼저 채워달라고 떼를 쓰고, 주님께서 내가 기도한대로 즉시 이뤄주시지 않고 침묵하시면 왜 내 뜻을 안들어주시느냐고 투덜대기도 하지요. 이처럼 주님의 뜻보다는 본인 뜻을 먼저 찾으며, 그분의 침묵에 조바심을 내는 분들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곤 합니다. “하느님은 도대체 얼마나 기도해야 들어주실까요?” 그러면 저는 그분들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멈추지 말고 계속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형제님의 기도대로 들어주시던지, 아니면 형제님의 생각을 바꿔주시든지 하실 겁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이처럼 기도에 어려움을 겪는 우리에게 좋은 이정표가 되어줄만한 내용입니다. 먼저 제1독서인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 기도하는 바람직한 자세가 아브라함에게서 드러납니다. 그는 죄악이 만연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려는 하느님께 자비를 베풀어주시라고 있는 힘껏 간청하지요. 만약 그 도시들에 하느님 뜻을 충실히 실천하며 사는 의인들이 있다면, 그런 의인과 죄인들을 한꺼번에 멸망시키시는 일이 공정과 자비의 하느님께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공정하고 자비로운 분으로 알고 있기에, 아브라함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이 자꾸만 하느님께 조건을 내걸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졸라대는 모습이 너무나 외람되고 무례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소돔과 고모라가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의인의 숫자를 계속해서 줄여나가면서 그들을 구원해주십사고 끈질기게 청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마치 당신과 줄다리기 협상을 벌이는 듯 끈질기게 청하는 그를 주제넘다며 벌하지 않으시고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십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성실하게 답변해 주시면서 말이지요. 이처럼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깊이 헤아리며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는 것, 또한 그 대화 안에서 자신과 이웃을 위해 필요한 것을 끈질기게 청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기도의 모습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를 바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그분을 어떤 분으로 여기며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부르시는 호칭인 ‘압바(αββ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단순히 ‘아버지’로 번역된 이 아람어는 자녀가 아버지를 친밀하게 여기며 사랑의 마음을 가득 담아 부르는 ‘애칭’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하여금 하느님을 이 호칭으로 부르게 하심으로써 그분의 피조물에 불과한 부족하고 약한 우리를 그분과 사랑의 친교를 맺은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들어 높여주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과 참된 일치를 이룸으로써 그분과 같은 영광을, 그분과 함께 누리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하느님께 기도를 바칠 때에도 그분 자녀다워야 합니다. 욕망에 휘둘려 마음 가는대로 청하기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당신 자녀인 ‘우리’ 모두가 참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그분 입장을 생각하며 신중하게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 청하는 내용 자체가 달라집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내용처럼 하느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이 세상에 그분의 뜻과 다스림이 실현되기를 먼저 청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청할 때에도 필요 이상으로 욕심 내지 않고 그날 필요한 것만 청할 수 있게 됩니다.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내일도 그 다음 날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충만하게 채워주시리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도록 유혹에 맞서 싸우며 죄를 멀리하고, 하느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해야 할 지 그 내용에 대해 알려주신 예수님은, 이제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할 때 지녀야 할 바람직한 마음가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것의 핵심은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임을 굳게 믿으며 실제로 삶 속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심으로 청하지도 않으면서 받기를 원하고,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얻기를 기대하며, 사력을 다해 두드려보지도 않고 그저 열리기만을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기도는 계속해서 실패를 경험하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청하라’고 하시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나의 믿음과 희망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이 묵상하며 그것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하여 나의 믿음과 희망이 조금씩 정돈되고 단단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찾으라’고 하시는 것은 나의 믿음과 희망을 그저 뜬구름 잡듯이 모호한 상태로 머리 속에만 담아두지 말고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해 봄으로써 내가 중점을 두고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마음 속에 분명하게 새기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내가 구원받기 위해 정말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잘 챙길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두드리라’고 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내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시겠지’하고 막연하게 기대하다가 실망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그분 마음을 두드려보고 직접 확인해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엉뚱한 곳을 헤매지 않고 하느님께 바로 나아가 그분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이 말씀에는 가장 중요한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기도의 본질에 대해 오해하다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청하고 찾고 두드리기만 하면 그분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신다고 오해하여 김칫국을 잔뜩 들이키고는, 결국 바라던대로 되지 않음에 크게 실망하여 ‘기도도 하느님도 다 무의미하고 필요없다’며 신앙생활을 그만두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하느님은 왜 우리가 청하는 그것을 주시지 않고 성령을 주시는가?, 우리가 무엇을 청해도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성령으로 정해져있다면 우리가 굳이 그분께 기도 중에 청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궁금증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채워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식으로, 가장 좋은 것을 채워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분의 마음과 뜻을 몰라볼 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활동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베풀어주실지를 아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당신께서 주시려는 그 선물을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바라고 청하기를 바라시지요. 그래야 그것을 놓치지 않고 제대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선물이 주는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이끄시어 우리의 바람이 하느님의 바람과 만나게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들을 가득히 받아 그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성령께서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시기에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먼저 성령을 보내주시는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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