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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5년 8월 26일 (화)연중 제21주간 화요일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가톨릭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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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는 것이 잘 믿는 것입니다.>

183856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08-01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1)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것에 대해서는,

“자기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즉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또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며 목수인 사람이 메시아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등으로 해석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것이 그들이 메시아께 바라고

있었던 것과 달랐기 때문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 강생을 갈망하면서 기다렸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에 정치적 독립과

세속적인 풍요를 가져다 줄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물질적이고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희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도 복음부터 선포하신 뒤에

그 복음을 풀이해 주는 설교를 하셨을 것입니다.

<루카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이사야서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희년’을 선포하시고 설교를 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4,21), 본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회개만 강조하는 메시아는 원하지 않았고,

자기들을 잘 먹이고, 잘 살게 해 줄 메시아만 원했습니다.

‘빵의 기적’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일이(요한 6,15) 대표적인 예입니다.

2) 오늘날에도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소원 때문에

입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예비신자 기간은 그럭저럭 잘 견디는데,

세례를 받고 나서도 여전히 그런 소원만 빌다가

실망하고서 냉담자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은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것들이고, 실감나지도 않는 것들인데 반해서,

당장 눈앞의 절박한 상황은 생생한 현실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찾고 기도를 하는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누구든지 힘이 빠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무슨 소원이든지 이루어진다고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문제이고, 반대로,

믿음도 없고,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마치 취미생활을 하는

것처럼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올바른 신앙에서 벗어나 있고,

예수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만 찾거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자렛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간절하게 기도하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식의

강의를 하면 명강사로 인기를 얻고, 회개만 강조하면

사람들에게 금방 외면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3) 야고보 사도는 헛된 것만 찾는 사람들을

이렇게 꾸짖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1-4).”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만 잘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받아내려고 애쓰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4)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이 권고에 대해서, “그러면 속세를 떠나서 수도 생활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아니고,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라는 권고입니다.

누구든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인데, 그래도 어떻든 성실하게 노동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분명히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남들보다 잘 산다고 해서 교만해지거나, 남들보다

못 산다고 좌절해서 믿음과 희망을 버리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것이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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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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