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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유일한 처방 ‘약(藥)’이다

183905 선우경 [forgod] 스크랩 2025-08-03

2025.8.3.연중 제18주일                                          

 

코헬1,2;2,21-23 콜로3,1-5.9-11 루카12,13-21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유일한 처방 ‘약(藥)’이다

“무지의 허무의 병(病), 탐욕의 병(病)”

 

 

“주님, 당신은 대대로

 우리의 안식처가 되시었나이다.”(시편90,1)

 

오늘 화답송 후렴이 강론 주제와 직결됩니다.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피난처가, 정주처가 될 때 비로소 한결같이 시종여일한 삶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와 관련되는 여러 예를 나눕니다. 옛 현자의 지혜입니다.

 

“길은 정해지면 바꿀수 없지만 걸음은 내가 정할 수 있다.”<다산>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제대로 주님을 향한 길따라 자기 페이스대로, 우보천리, 호시우행의 자세로 가면 됩니다.

“인(仁)이 있는 곳은 아름답다. 사는 곳을 선택하되 스스로 인(仁)에 거하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고 하겠는가?”<논어>

삶은, 행복은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인(仁)을, 사랑을 선택, 훈련, 습관화할 때 사필귀정 복된 행운이 뒤따릅니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제 친지가 보내준 “백수의 등급”이란 글중 ‘2위 화백’과 ‘1위 도백’이 재미있어 나눕니다.

 

“화백은 화려한 백수로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 0식님 이나, 아침 한끼만 먹는 일식님으로 부인으로부터 존경받는 남정네, 아침식사후 나가면 해가진 후에 귀가하는 낮에는 집에 없는 착한 배우자, 지갑과 두귀는 열고 입을 닫아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어르신, 베풀지만 생색내지 않는 노신사, 변덕이 없는 바위같은 믿을 수 있는 노인, 어딜가나 많은 사람들이 환영하고 존경하는 멋지고 덕망있는 만인의 친구!”

 

참 멋지고 아름다운 극히 드문 노년인생이라 배울바 많습니다. 젊어서부터 이렇게 주님을 믿으며 지혜롭게 살았기에 이런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인생에 도약이나 비약은 없습니다. 노년인생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과거의 삶입니다. 

 

“도백은 ‘도전하는 백수’입니다. 지나치면 주책입니다만 적당한 도전적 자세는 바람직합니다. 젊었을 때 하고 싶었으나 여러 가지 제약으로 하지 못했던 것에 도전하며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백수, 자기발전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고 봉사하고 노력하는 영원한 청춘, 영원한 현역이다.”

 

참 이상적인 인생 노년의 모습은 한결같이 영원한 청춘, 영원한 현역의 구도자와 수행자로 살아가는 화려한 백수, 도전하는 백수일 것입니다. 밖에서는 우아한 백조지만 보이지 않는 물밑에서의 부단한 발짓의 움직임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노력하는 자세가 참된 신앙인임을 보여줍니다. 아주 오래전 젊은 수도자들 피정지도시 묘비명을 써보라 했을 때 도발적 묘비명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도 생각납니다. 

 

“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바로 오늘 주일 제1독서 서두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코헬렛>에 이어지는 <아가서>입니다. 이 두 성서는 과거 문제가 많다하여 성경에 편입해야 하는가 논란이 됐었다는데 성경에 속하게 됨으로 풍요로운 영적삶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모릅니다. 이 둘이 빠진 성경이었다면 참 메마르고 삭막했을 것입니다. 

 

인간 마음의 고질병 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지의 병에 속하는 ‘허무의 병’이자 ‘탐욕의 병’입니다. 허무와 탐욕은 인간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허무해서 인간이요 탐욕을 지녀 인간입니다. 먼저 허무의 병에 대해 살펴봅니다. 때때로 젖어드는, 스며나오는 인생무상, 허무와 무의미한 존재론적 감정은 누구나의 실존적 체험일 것입니다. 코헬렛의 구구절절 고백에 공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애쓰고서는 애쓰지 않은 사람에게 제몫을 넘겨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또한 허무요 불행이다. 그렇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줄을 모르니, 이 또한 허무로다.”

 

바로 이것이 인간입니다. 적나라한 인간의 부정적 현실입니다. 허무와 무의미의 늪에, 수렁에 빠지면,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속에 빠지면 참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이래서 죄악의 유혹에 빠져 존엄한 품위를 잃고 타락과 온갖 심신의 질병이니 바로 이런 상태가 지옥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무지의 허무와 무의미, 절망의 늪에서,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찌보면 이런 허무와 무의미, 절망은 하느님 구원의 초대장일 수 있습니다. 신망애(信望愛)의 주님, 진리와 지혜의 주님을 찾으라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허무의 병에 이어 탐욕의 병입니다. 탐욕을 경계하라는 주님의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무지의 어리석음에 눈먼 사람은 건강과 밥과 돈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예수님은 부유를 정죄하지도 않았고 가난을 찬양하지도 않았습니다. 탐욕의 지혜로운 활용이, 지혜로운 분별이 자제와 절제가 중요합니다. 잘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쓰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땅에 쌓고 모으는데 집중할 뿐 주위에 완전히 닫힌 자기 감옥속에 갇힌 수인이 되었습니다. 하늘 향한 찬미와 감사의 문도 없고 이웃향한 나눔 사랑의 문도 없습니다. 하늘과 이웃과 완전 불통의 삶입니다. 천국같지만 내용은 고립단절의 지옥이자 자기감옥의 수인입니다.

 

탐욕을 마냥 탓할 수는 없습니다. 탐욕의 원인을 찾아보면 바로 탐욕의 깊은 중심부에 ‘두려움’이 또아리 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바로 현재는 물론 미래에 대한 두려움, 병고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등 온갖 두려움에 자연스럽게 발동하는 자기보존 본능과도 같은 탐욕입니다. 이래서 누누이 “두려워하지 마라” 강조하는 주님입니다. 바로 두려움은 주님 향한 신망애의 결핍을 반영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은 인간의 보편적 현상입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둘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지?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자, 내가 여러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앃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자.”

 

말그대로 자기도취의 착각입니다.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임을 몰랐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비춰주는 거울같은, 회개를 촉구하는 복음입니다. 존재냐 소유냐? 존재는 자유롭게 하지만 소유는 노예로 만듭니다. 존재의 기쁨이요 소유의 쾌락입니다. 소유욕에서 벗어나 존재의 삶을 우선하라는 교훈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심판선고가 준열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얻은 것은 재물이요 잃은 것은 목숨이라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어리석은 비극이겠는지요!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저는 이 복음의 일화를 대할 때 마다 인색한 부자 스쿠르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와 비슷한 꿈을 꾸고 난후 회개하여 재물을 나눈 스쿠르지처럼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도 꿈에서 깨어나 이웃과 나누는 회개의 삶으로 구원받지 않았겠나 상상해 봅니다.

 

허무의 병, 탐욕의 병이 치유되어야 비로소 자유로운 삶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만 곧장 치유에 돌입하면 완쾌될 수 있습니다. 하무와 탐욕의 무지의 병에 최고의 유일한 처방약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처방약이 바로 답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지상에 살되 천상의 그리스도안에 뿌리둔 우리의 복된 신원이기에 초연과 이탈의 자유로운 삶입니다. 허무와 탐욕의 병의 치유에 유일한 처방약은 날로 그리스도 예수님과 우정의 사랑을 깊이하는데 있음을 봅니다. 더불어 우리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은 저절로 시들어 죽을 것이요 물론 거짓말도 사라질 것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오늘 강론의 결론이자 우리 모두에게 부여되는 평생과제입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참 고맙게도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허무와 탐욕의 병을 점차 치유해 주시고,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시며, 주님을 닮은 새 인간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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