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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5년 9월 3일 (수)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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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일 다해]

184052 박영희 [corenelia] 스크랩 2025-08-10

[연중 제19주일 다해] 루카 12,32-48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흔히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철저한 순명을 통해 현세에서 넘치도록 많은 복을 받아 누렸을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약속이 후손들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기쁨과 영광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75세가 넘은 나이에 정든 땅을 떠나 낯선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75세면 타향에 머물다가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이입니다. 하던 일도 정리하고 편안하게 노후를 즐길 나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자신은 물론 그 후손들에게까지 큰 축복을 베풀어주시겠다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꺼이 낯선 곳으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겁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나의 신앙이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신앙은 현실에 타협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이라면 도전과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이라면 편안함과 안락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나라에 받아주십니다. 당신 사랑과 자비의 품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이유이자, 간절히 바라는 최종 목표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를 우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은 그 수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간절히 원해도 갖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바라는 마음이 클수록 갖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하게 되지요. 그러나 ‘하느님 나라’라는 보물은 하느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우리에게 주실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지위가, 하늘나라의 백성이라는 신분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게 아니지요.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국적은 자동으로 주어지지만, 그 나라의 국민으로써 지위와 권한을 누리기 위해서는 법과 규정을 잘 지키며 맡은 바 책임을 다 해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이자 백성으로써 그분 나라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싶으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잘 지키며 그분 뜻을 충실히 실천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첫번째는 자신이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 즉 자선입니다. 우리는 자선을 남을 위해 베푸는 것이라 착각하지만, 사실 자선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무언가를 소유하면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갖고 싶은 게 사람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탐욕으로 바뀌고 집착까지 더해지면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했던 부자 청년에게,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재물과 능력은 그것을 가진 사람만 마음껏 누리라고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특별한 의도와 뜻을 가지고 나에게 맡겨주신 소명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큰 은총과 복을 베푸신 것이 이웃 형제 자매들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어서라고 여깁니다. 즉 재물은 베풀고 나누라고 주신 것이고, 능력은 봉사하고 섬기라고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면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또한 그들이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느끼며 기쁨을 누리는 만큼, 나도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맘껏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하늘에 마련해 둘 수 있는 최고의 ‘보물’이지요.

 

우리가 실천해야 할 두번째는 깨어있는 자세로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을 참으로 힘들어 합니다. 그 기다림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식이 되면 무료함과 지루함이 더해져 괴로움이 더 커지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시는 건 그저 잠들지 말고 버티라거나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밤 늦은 시간에 돌아오는 주인이 문 밖에서 추위에 떨지 않도록, 주인이 도착하면 곧바로 문을 열어주기 위해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따뜻한 환영과 봉사가 주인에게 힘을 주고 기쁨이 될 수 있게 진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건 누가 시킨다고 해서 억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 일이고 의무니까 마지 못해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인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주인을 다시 만나는 일이 나에게 기쁨이어야만 그 힘으로 할 수 있지요. 사랑으로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기다림이 그 자체로 기쁨이고 행복이지만, 사랑 없이 의무감과 두려움 때문에 기다리는 이에게 기다림은 그저 고역일 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맞이하는 우리의 기다림이 고역이 아니라 기쁨이 되길 바라십니다. 그 기쁨의 힘으로 지금 여기에서 당신 뜻을 충실히 실천하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신앙생활 하는 우리가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준비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 즉 심판주로 만나게 되는 ‘종말의 때’는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갑자기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종말의 때’에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심판을 통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이들이 정해진다고 하니, 지금 현재는 심판이나 영원한 생명과 상관 없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우리가 죽고 난 뒤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내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은 죽고 난 뒤에야 시작되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에 충실히 머무르지 못하고 막연히 미래를 낙관만 하는 이는 ‘영원’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매일 매 순간을 결코 헛되이 흘려보내서는 안되겠습니다. 머리로 깨달은 구원의 진리를 즉시 행동으로 실천하여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조금씩 변해가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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