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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

184147 박영희 [corenelia] 스크랩 2025-08-14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 마태 18,21-19,1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참 많은 은혜를 입으며 삽니다. 부모님 은혜는 말할 것도 없고 참 스승이나 절친한 벗, 가까운 이웃들로부터 좋은 영향과 도움을 받으며 살지요. 또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으로부터 받는 여러 혜택들, 즉 우리가 딛고 선 땅, 숨쉬는 공기, 따사로운 햇볕, 시원한 물 같은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리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 용서와 자비가 우리를 사람답게, 기쁘고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토록 많이 받아 누리는 수많은 은혜의 고마움에 대해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다가 어느 하나가 결핍되면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기도 하지요. 그런 상태에서는 자연스레 마음 씀씀이가 팍팍해지고 이웃을 대하는 태도도 야박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도 그런 마음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고 자꾸만 속을 긁는 저 미운 형제들을 대체 언제까지 참고 견뎌주어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따지듯 물은 겁니다.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크나큰 은총과 기쁨은 까맣게 잊은 채로 말이지요.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용서란 단지 상대의 허물과 잘못을 눈감아주고 참아주는게 아니라, 그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안에 끌어안는 것이라는 점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그 비유에는 임금으로부터 ‘일만 탈렌트’라는 거액을 빚진 종이 나옵니다. 그 금액이 오늘날 원화가치로 거의 6조에 해당한다는 복잡한 계산은 뒤로 미루더라도, ‘만’이라는 숫자는 고대 근동지방에서 사용하던 가장 높은 단위의 수이고, ‘탈렌트’는 가장 큰 화폐단위입니다. 이 둘을 곱한 것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액수로써 비천한 ‘종’의 신분으로 그런 큰 빚을 진 사람은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 없음이 너무나 자명하지요. 그렇기에 그 종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임금 앞에 납작 엎드려 그의 자비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할지 그 처분은 임금에게 전적으로 맡긴 채 말입니다. 그런 처지가 바로 베드로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처한 상황입니다.

 

비유 속 임금은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끼친 그 종을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그가 진 빚까지 전부 탕감해줍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재물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보상해서도, 믿을만한 ‘보증인’을 내세워서도 아니지요. 단지 자신에게 간절하게 호소하는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임금의 모습에서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원동력이 어디서 나오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용서는 내가 입은 피해나 상처에만 시선이 머물러 있으면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 밉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커져서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시선이 상대의 안쓰러운 처지, 난처한 입장, 부족함과 약함 같은 내적인 부분에 집중하면 막상 그렇게 어렵기만한 일도 아니지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선한 본성이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공감과 자비라는 긍정의 힘을 길어올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으로, 또한 내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큰 용서와 자비,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허물 많고 부족한 형제를 내 안에 끌어안으라고 하십니다. 내가 실천한 그 용서와 자비가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비와 은총을 완성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받았던 열 명의 나병환자 중 오직 이방인 한 명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림으로써, 그가 받은 치유의 은총이 구원이라는 더 큰 차원으로 확장된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니 더 이상 핑계대거나 미룰 생각 말고 얼른 용서해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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