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영진 신부님_<용서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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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51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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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28-35).”
1)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용서’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용서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경우,
그것 때문에 죄의식이나 죄책감이 생기는 것,
바로 그것이 용서 때문에 생기는 강박관념입니다.
가해자는 자기가 잘못한 것을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렸거나
인정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잘 살고 있는데, 피해자는
상처가 너무 커서 고통스럽고, 분하고, 억울하고, 울화병에
걸릴 지경이고...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라는 말씀만
하고 계시니... “용서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을 어쩌란
말이냐?” 라고 항의해도 들어 주는 이가 없고...
가해자는 회개하지 않고 고해성사도 안 보는데, 피해자는
용서를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고해성사를 보는,
아주 이상한 상황이 실제로 자주 생깁니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조금 떨어져서 제3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런 일들을
모르셔서 용서하라는 말씀만 하신 것일까?>
우리는 그런 상황을 단순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용서를 안 하려고 작정하는 것은 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상처가 너무 커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용서가 안 되는 것은, 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을 하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라면, 주님께 도움을
청하면 됩니다.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2)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어서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해도,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두 가지를 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앙갚음’을 하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분해도 ‘저주’를 하면 안 된다는 것.
‘앙갚음’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또 ‘저주’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야고 3,9-10).”
3) ‘매정한 종의 비유’의 가르침은 두 가지입니다.
(1) 하느님께서 이미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
(2)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려면, 청하기 전에 먼저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
<이 두 가르침은 사실상 같은 가르침입니다.>
‘매정한 종의 비유’를 표현되어 있는 순서대로 보면,
이 비유는, 하느님께서 먼저 나를 용서하셨고,
그 용서의 은총을 내가 형제에게도 나누어 주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은총을 받기만 하고, 형제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취소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 것을 내가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형제에게 나누어 주어야
그것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됩니다.>
비유의 순서를 조금 바꿔서,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일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하느님께 가서 용서를 청하는
상황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용서를 청할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4) 용서는 악을 참기만 하는 소극적인 일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적극적인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정의의 실현은 말씀하시지 않고 용서만
강조하시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는데, 예수님도
악인의 처벌을 언급하셨습니다(마태 23,35-36).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악인들은 엄한 처벌을 받을 것이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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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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