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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5년 9월 9일 (화)연중 제23주간 화요일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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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어린이와 같이 되라 “하느님의 나라와 어린이들

184185 선우경 [forgod] 스크랩 2025-08-16

2025.8.16.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여호24,14-29 마태19,13-15

 

 

어린이와 같이 되라

“하느님의 나라와 어린이들”

 

 

"주님, 좋으시다, 찬미들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07,1)

 

오늘 복음의 주제는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입니다. 예수님의 각별한 어린이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니 누구보다도 어린이다움을 지니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사실 나이에 관계없이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는 어린이들이요, 그래서 좋은 동시나 동요, 동화는 누구나 공감합니다. 예전 5월에 어른 피정자들과 함께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면 70-80대 노인들도 어린이들처럼 즐거워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어제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서울대교구 유경촌 디모테오 주교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하늘에 올림을 받으실 정도로 어린이같은 삶을 사셨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교님 문장紋章을 만들어 준 어느 사제가 주교님 영전에 올린 글의 일부를 나눕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품성과 깊은 믿음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강물처럼 내면을 적시며 흘렀습니다. 조용한 미소 속에는 생명의 원천이 있었고, 그 눈빛에는 저 깊은 강을 건너간 이들의 평안이 서려 있었습니다. 

권위보다 섬김을, 위엄보다 겸손을 택하신 당신은 이 시대 당신이 주교로 불리움을 받은 소명을 너무나 깊이 깨닫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주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많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 조용함 속에 깃든 시대의 징표를 읽습니다. 이 시대 종교가 잃어버린 진정성을 당신은 우리에게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생각하면 까닭없이 눈물이 납니다. 당신 앞에 비춰보이는 제 희미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순수한 열정의 동심을 간직한 분이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이하면 떠오르는 칼릴 지브런의 고전에 속하는 <예언자>에 나오는 ‘아이들에 대하여’ 라는 잠언성글입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니다.

 그대는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가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 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는 마라.

 큰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예수님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이런 어린이들의 특성을 깨달았기에 늘 배우는 마음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앞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어 오늘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는 이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에게 강복하신후 홀연히 그곳을 떠나십니다. 

 

어린이같은 자질은 무엇일까요? 바로 단순성과 개방성,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마음, 편견없는 태도, 변화와 적응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입니다. 오직 이런 사람들만이 복음의 메시지를 온전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말 그대로 회개에 신속한 이들입니다. 마음의 귀를 활짝 열고 귀기울여 듣는 자세가 참으로 중요함을 배웁니다.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공부란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사람이 되는 일이다.”<다산>

“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그때 학문을 닦으라.”<논어>

“진리는 깨닫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말이 많다는 비난은 있어도, 많이 듣는다는 핀잔은 없다.”<다산>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논어>

 

회개와 직결되는 들음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어린이같은 삶을 선택-훈련-습관화 하는 것입니다. 들음과 회개를 선택하여 일상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여호수아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모세에 이어 등장한 여호수아가 백 십세에 책임을 다하고 삶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멋진 죽음과 더불어 여호수아서도 끝납니다. 여호수아는 스켐집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듭 주님을 섬길 것인지 혹은 이방신들을 섬길 것인지 선택을 촉구합니다.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여호수아는 이어 백성의 거듭된 답을 받아냅니다.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여호수아는 스켐 집회에서 백성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웁니다. 이렇게 마지막 책임을 다한 후 주님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죽습니다. 시종여일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전념하며 그 사명을 다하고 백 열 살에 세상을 떠난 주님의 종 여호수아의 아름답고 거룩한 생애입니다. 

 

여기서 유난히 눈에 자주 띄는 “주님을 섬긴다”는 말마디입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해 겸손히 주님을 섬기는 삶을 습관화 함이 어린이같은 삶을 사는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되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의 삶이 참 소중하게 생각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섬김으로 주님을 닮게 하시며 어린이와 같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자비하심을

 중생에게 베푸신 기적들을."(시편107,8).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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