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영진 신부님_<교회는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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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91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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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마태 19,13-15).”
1) 이 이야기는 ‘교회의 역할’,
또는 ‘신앙인들의 역할’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교회는, 또는 신앙인들은 예수님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통로가 되어 주기는커녕 ‘장벽’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는 ‘큰 죄’가 됩니다.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마르 10,14).
‘언짢아하시며’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화를 내시며’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오는 것을 막은 제자들의 행동은
예수님께서 화를 내실 정도로 크게 잘못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즉 소외계층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는
신앙인이라면 거스를 수 없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내버려두라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인도하고 안내하라는 명령입니다.>
2) 만일에 사회적으로 지위와 신분이 높은 사람이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다면, 제자들이 막았을까?
소외계층 사람들은 막고, 상류층 사람들은 막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고, 그 차별 자체가 죄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야고 2,1-4.8-9).”
<만일에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말이 불편하게 들리거나,
또는 특별한 사람은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처음부터 교리 공부를 다시 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특별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한
특별한 사람은 원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의 18장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8,3).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전부 다,
예수님 앞에서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3)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장벽’이 되어서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가로막은 일들이 여러 번 있습니다.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마르 2,2-4).”
사람들에게 막혀서 지붕에 구멍을 내야만 했던 그 병자는,
치유된 뒤에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서 나갔습니다(마르 2,12).
없었던 통로가 나중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조금씩 비켜 주었다면 처음부터 쉽게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루카 19,3).”
자캐오의 키가 작은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은, 키가 작았기 때문이
아니라, 군중이 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캐오의 이야기 바로 앞에 있는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루카 18,35ㄴ-39).”
잠자코 있으라고 바르티매오를 꾸짖은 사람들의 눈에는,
그의 간절함은 보이지 않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방해하는 것으로만 보였던 것 같습니다.
4) 예수님의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
안식처가 되어야 하고,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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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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