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20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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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09 박영희 [corenelia] 스크랩 202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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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일 다해] 루카 12,49-53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소가 마신 물은 젖이 되고 뱀이 마신 물은 독이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똑같은 물을 마셔도 소는 그 물로 자신의 새끼를 먹여 살릴 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유익한 우유를 만들어내지만, 뱀은 그 물로 다른 생명을 해치는 독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사물이 그 자체로 선하고 악한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누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는가에 따라 선 혹은 악이라는 상반된 결과로 나타나는 겁니다. 가령 같은 칼을 사용하여 요리사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의사는 환자를 수술하여 살립니다. 반면 마음 속에 분노와 원망이 가득한 이들은 그 칼을 자기 기분 내키는대로 함부로 휘둘러 남을 다치게 하거나 목숨을 빼앗기도 하지요. 그렇기에 칼이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주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칼 자체를 탓할 게 아니라 그 칼을 사용하는 내가 바른 의도와 지향을 지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점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불’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지만, ‘불을 지르는’ 건 좀 다르지요. 불을 지른다는 건 어떤 물건이나 장소에 고의로 불을 붙여 태우는 걸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을 지르는 행동의 의도는 보통 자기 분노의 표출이나 불특정 다수에 대한 공격 등 부정적이고 악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몇 주 전에 있었던 지하철 내 방화시도 사건도 그랬지요. 그렇기에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심지어 그 불이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표현이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당신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주신 분이 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나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르고자 하시는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파괴하는 ‘화마’(火魔)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당신 피조물인 인간 모두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바라시지요. 그래서 우리 마음에 당신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불꽃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세상의 부귀영화에만 눈이 멀어 하느님께서 붙여주신 신앙의 불을 꺼뜨려버렸고, 이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마음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불타올라 그분 뜻을 따르게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구원과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저 마음 먹는 수준으로는 안 됩니다. 세상 것들에 대한 탐욕과 집착으로 가득 한 나를 죽이고, 하느님 자녀로 완전히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이루어야 하지요.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를 ‘세례’라고 부릅니다. 즉 우리가 받는 세례성사는 그저 이마에 물을 뿌리고 세례명을 받는 ‘의식’(儀式)이 아니라, 나의 욕심과 고집을 비우고 하느님 뜻에 철저히 순명함으로써 그분을 닮은 모습으로 완전히 변화되는 ‘회개’와 ‘재탄생’의 과정인 겁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우며 또 오래 걸리기에, 우리 힘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께서 인간이 되기까지 자신을 낮추시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또한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큰 고통을 겪고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 사랑의 희생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받으셔야만 했던 ‘구원의 세례’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약한 인간이기에, 주님의 은총과 도움 없이는 회개할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기에, ‘구원의 세례’ 자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십자가의 무게에 짓눌려 고통 받으시는 시간을 줄여드릴 수는 있지요. 우리가 ‘자기 합리화’나 ‘남탓’을 하지 않고 자기 잘못을 솔직히 인정한다면, 나태함과 안일함에서 벗어나 자기 죄를 즉시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용서와 자비를 실천한다면, 주님께서도 더 이상 우리 죄의 무게에 짓눌리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리실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참된 평화는 무력을 이용하여 억지로 만드는 일시적 안정상태가 아닙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고통과 시련이라는 세상의 거센 풍랑에도 무너지지 않고 담대하고 굳건하게 서 있는 ‘내적 평정심’의 상태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 이후에 하느님 품 안에서 편안한 안식,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영원토록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 참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분열’의 과정이 필수적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열은 자기 욕망을 더 많이 채우고, 자기 주장을 더 많이 관철시키기 위해 대책 없이 갈라지고 나뉘어지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정한 규칙과 가치관에서 나를 잘라내어 하느님 뜻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한 분열입니다. 자꾸만 어둠 속에 물들어가는 나를 죄악으로부터 잘라내어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구원의 빛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기 위한 분열입니다. ‘좋은 게 좋은거지’라는 나태함과 안일함의 암덩어리들을 나에게서 잘라내어 하느님 뜻에 비추어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하기 위한 분열입니다. 중요한 것은 분열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열이 왜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분열을 통해 내가 지켜야 할 것과 배격해야 할 것을 올바르게 ‘식별’하는 것입니다. 분열 이후에 내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 지 그 ‘방향’을 제대로 잡는 것입니다.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평화인 게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가 온전히 실현된 상태가 평화입니다. 하느님 뜻에 순명하여 그분의 자비와 정의를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은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내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일치를 향해 나아갑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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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진 신부님_<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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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13
최원석
202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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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근 신부님-“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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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12
최원석
202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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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신부님_반복되는 일상이 구차스러워 보일지라도,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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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11
최원석
202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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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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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10
최원석
202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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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0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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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09
박영희
202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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