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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5년 9월 10일 (수)연중 제23주간 수요일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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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신 분입니다.>

184213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08-17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49-53).”

1)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나는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려고 왔다.”입니다.

또는 “나는 세상에 하느님 사랑을 전해 주려고 왔다.”입니다.

성경에서 ‘불’이 ‘심판의 상징’으로 사용될 때가 많은데,

여기서는 ‘예수님의 복음’, 또는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라는 말씀은,

당신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은 적고, 거부하는

자들은 많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은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양들 쪽에서 목자의 심정에는 관심도 없고, 제멋대로

자기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버리는 것과 같은 상황......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을 위해서

일하시는데, 인간들 쪽에서 외면하는 상황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세례성사의 ‘물’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라는 말씀은, 믿기를 거부하고, 회개하는 것도 거부하고,

구원의 반대쪽으로만 가는, 즉 멸망을 향해서 가는 인간들

때문에 당신이 큰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뜻인데, 이 말씀도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2)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라는

말씀은, 세상에 ‘참 평화’를 주려고 왔는데, 그것을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치 분열을 일으키려고 온 것처럼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4-18).”

<‘사랑’은 인류가 하나로 일치하는 방법이고,

‘평화’는 그 일치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신 일이고,

그 사랑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서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3)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도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도

거부하는데, 그렇게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은 식구들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믿는 사람들이 분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일치를 지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일치를 바라십니다(요한 17,21).>

4) 가정의 분열은 원래는 종말의 상황을 상징하고(미카 7,6),

분열된 가정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은

‘메시아의 구원’을 상징합니다(말라 3,24).

여기서 식구들의 분열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종말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회개와 일치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호소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뒤의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이 말씀은, 식구들을 실제로 미워하라는 뜻도 아니고,

식구들을 버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이산가족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가족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영적 동반자입니다.

우리는 식구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해야

하고, 그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5) 식구들이 선을 등지고 악을 향해서 갈 때에,

또 구원에서 멀어지면서 자꾸만 멸망을 향해서 갈 때에,

그것을 막고 되돌아서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만일에 식구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식구들이 가는

‘악의 길’과 ‘멸망의 길’을 함께 간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어리석음’입니다.

‘참 사랑’은 ‘선’을 지향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의

경우에, 한쪽이 죄를 지으려고 할 때 다른 쪽에서 “이러면

안 된다.” 라고 말렸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둘이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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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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