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행하여라. ” (마태 23. 13)
껍데기와 본질 사이에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단호히 외치십니다.
"불행하여라!"
그들이 하느님께 가는 문,
곧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는 자리가 가장 큰 불행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성전보다 금을, 제단보다 예물을 더 귀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즉, 본질보다 표징을, 관계보다 외형을, 하느님의 현존보다 껍데기를 추구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2천 년 전 율법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입니다.
오늘의 금과 예물
오늘날 우리는 어떤 '금과 예물'에 매달리고 있을까요?
교회 안에서: 화려한 성당 건물이나 값비싼 전례 용품에 집착하면서, 정작 가난한 이웃에게는 인색한 모습을 보이지 않나요? 미사 중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에 더 신경 쓰면서, 정작 말씀에는 집중하지 못하지 않나요?
신앙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는지, 얼마나 많은 헌금을 냈는지만 중요하게 여기면서, 실제 삶에서는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지 않나요? 성인 성명이나 교회 직책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데만 집중하면서, 겸손한 봉사는 뒤로 미루지 않나요?
일상에서: 자녀들의 신앙교육보다 성적과 진학에만 매달리면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고 있지 않나요?
눈먼 인도자와 투명한 창
예수님은 그들을 '눈먼 인도자'라고 부르십니다.
눈이 멀면 본질을 보지 못하고, 외적인 가치에 매달릴 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이 눈이 먼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길입니다. 교회와 신앙인은 자신을 드러내는 무대 배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을 투과시키는 투명한 창이어야 합니다.
드러내지 않고 선을 행하고, 판단하기 보다 이해하고,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할 때, 우리는 하늘나라의 문을 닫는 자리가 아니라. 열어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의 외침
예수님의 "불행하여라!"는 단순한 분노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흔들어 깨우는 사랑의 외침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시려는 그분의 열정,
본질로 우리를 돌려세우려는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사막에서 눈을 뜬 인도자 이야기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한 율법학자의 마음을 상상해 봅니다.
어느 날, 한 율법학자가 성전에서 예수라는 젊은이의 외침을 들었다.
“불행하여라, 위선자들아!”
그 말은 불처럼 그의 가슴을 태웠다.
분노했지만, 그 말은 거울처럼 그의 민낯을 비추었다.
그는 도망치듯 성전을 나와, 사막으로 몸을 숨겼다.
사막은 잔인했다.
모래바람이 그의 눈을 가리고, 그는 길을 잃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작고, 얼마나 텅 빈 존재인지 깨달았다.
그때, 거룩한 한 분이 다가와 그를 안아 주었다.
“너는 나의 모상이다.
그 누구도 너를 해칠 수 없다.
너 스스로조차 너를 함부로 하지 말아라.”
그 말에 그의 눈물이 모래 위에 떨어졌다.
마치 메마른 땅에 샘물이 솟듯,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생명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그가 더 이상 옛 율법의 무게로 사람들을 짓누르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는 사랑으로 인도했고, 자비로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사막에서 눈을 뜬 인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