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영진 신부님_<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바치는 것이 봉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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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19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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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3-26).”
1) ‘박하, 시라, 소회향’은 빵이나 과자를 구울 때
맛과 향을 내기 위한 향신료로 사용하는 식물들입니다.
십일조 규정을 보면, 신명기 14장 22절에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모든 소출의 십분의 일’로
표현되어 있고, 신명기 14장 23절에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분의 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23절의 규정대로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바쳤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과일과 가축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바치게 되었고, 22절의 규정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모든 채소와 조미료와 향신료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바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바치지 않아도 될 것까지
바치면서도 정말로 하느님께 바쳐야 할 ‘의로움, 자비,
신의’는 바치지 않는다고 꾸짖으십니다.
‘의로움’은 ‘의로운 재판’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정의를 실천하는 일을 뜻합니다.
‘자비’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뜻하고,
‘신의’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성실함을 뜻합니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이라는 말씀은,
십일조 자체는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원래 십일조는 ‘불쌍한 이방인들과 고아들과 과부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바치는, 즉 불우이웃 돕기를 위한
헌금이었습니다(신명 14,29).
그런데 위선자들은,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신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런 일은 봉헌도 아니고, 사랑 실천도 아니고,
자기 자랑, 허세, 교만, 위선일 뿐입니다.>
2)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려면, 하느님께서 받기를
바라시는 것을 바쳐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받기를 바라시는 것은 자기 신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바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의로움, 자비, 신의’ 등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위선을 볼 때가 더러 있습니다.
바치는 쪽에서는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기를 바라고,
받는 쪽에서는 바친 사람의 이름을 동판에 새겨서
전시해 놓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시고, 다 기억하실 텐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굳이 눈에 잘 뜨이는 곳에 이름을 새겨 놓고서
사람들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봉헌이 아니라 그냥 위선과 교만입니다.
3)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는,
“사소한 규정들은 잘 지키면서”입니다.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는, “정말로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계명’은 실천하지 않는다.”입니다.
이 말씀은, 앞의 23절의 말씀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4)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은,
“겉으로 보이는 정결 예식은 잘 하지만”,
또는 “겉으로는 깨끗하고 거룩하게 보이지만”입니다.
‘탐욕’은, ‘약탈품, 도둑질한 물건’을 뜻합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40).”
‘방종’은 ‘무절제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다.”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음식을 빼앗아 잔과 접시에 담아서
무절제하게 먹어댄다는 뜻이고, 그들이 겉으로만
정결 예식을 지키고 윤리적으로는 타락한 생활을
하는 것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는, “먼저 너희의 마음과
삶부터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여라.”입니다.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윤리적으로 올바른 생활을 해야만
하느님께서 깨끗하고 거룩하다고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5) 23절의 ‘십일조’와 25절의 ‘탐욕’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서 그 가운데 일부를 십일조로 바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 그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의 눈에는
봉헌을 잘하는 신심 깊은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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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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