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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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47 조재형 [umbrella] 스크랩 202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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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TV보다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에서 영상을 더 자주 보게 됩니다. 어느 날 우연히 《트리거》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는데, 내용이 참 묵직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 평범한 사건이 어느 순간 ‘트리거’, 즉 방아쇠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충동적으로 반응합니다. 분노하고, 정죄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처음엔 정의를 실현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정의보다 더 큰 복수심과 자기 확신에 휩싸여,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버립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 한편이 불편했습니다. 저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안에도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누군가가 나를 무시했을 때, 말 한마디가 억울하게 왜곡되었을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정죄의 손가락’을 올립니다. “저 사람은 벌 받아야 해.” “정의는 살아 있어야지.” 그렇게 말하면서, 스스로는 마치 정의로운 사람, 심판자의 자리에 오르려 합니다.
오늘 복음에도 그런 모습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며 이삭을 뜯어 먹었습니다. 이를 본 바리사이들이 말합니다. “당신네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들은 율법을 기준으로 예수님을 심판합니다.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단죄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의 이야기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다윗과 그의 일행도 배가 고팠을 때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제단의 빵을 먹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이 말은 단순한 선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인간을 얽매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살리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사람을 위해 율법이 존재해야지, 율법을 위해 사람이 희생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사람을 먼저 보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려는 무리 앞에서도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캐오처럼 손가락질받던 사람을 찾아가 그의 집에 머무르셨고, 세리들과 죄인들과도 식탁을 함께하셨습니다. 심판 대신 자비, 배척 대신 회복, 정죄 대신 구원이었습니다. 드라마 《트리거》는 우리 안에 있는 심판의 욕망, 폭력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방아쇠를 당기려 하느냐, 아니면 예수님처럼 손을 내밀겠느냐”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 그를 단죄하는 건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를 이해하고, 기다려 주고, 기도해 주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그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심판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더욱더 자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방아쇠를 당기기보다 손을 내밀고, 정죄하기보다 감싸안고, 돌을 들기보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삶. 그것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참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생각에만 머무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정리해 주십니다.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은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정하였습니다. 안식일에 해서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관한 생각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불가에서는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계명과 율법이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안식일의 규정도 버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을 만날 때입니다.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 더 고마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 보면 ‘해결사’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안 되는 방법을 찾는 바리사이가 되기보다는 되는 방법을 찾는 주님의 제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가 심판보다 자비를 선택하는 여정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처럼. 자비의 주님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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