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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5년 10월 1일 (수)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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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단식 논쟁> “그리

184655 선우경 [forgod] 스크랩 2025-09-05

2025.9.5.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콜로1,15-20 루카5,33-39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단식 논쟁>

“그리스도 예수님이 새로움의 답이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하바3,19)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과 더불어 새것과 헌것에 대한 깊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단식하면 떠오르는 일화가 슬며시 웃음짓게 합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아주 오래전 옛 장상의 유머스러우면서도 영성 핵심을 담고 있는 말마디입니다. 또 베네딕도 규칙의 다음 두 가르침도 좋아합니다.

“단식을 사랑하라(Jeiunium amare)”<성규4,13>

“순결을 사랑하라(Castitatem amare)”<성규4,64>

 

단식뿐 아니라 순결도, 겸청도, 겸손도, 순종도, 침묵도, 고독도, 가난도, 공부도, 전례도, 미사도 즉 모든 덕목을 하느님을 사랑하듯 자발적 기쁨으로 사랑할 때 참 멋지고 아름다운 수행자의 삶이겠습니다. 오늘은 노자 도덕경의 지혜도 수행생활에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만족할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 갈 수 있다.”<도덕경>

 

더불어 생각나는 시편 성구,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시편46,12ㄱ)는 말씀처럼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많으니 멈춤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이 논쟁의 핵심입니다. 분명히 할 바 단식은 절대 규정이 아니라 상대적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단식, 기도, 자선의 3대 전통적 수행입니다. 단식이 기도와 자선으로 이어져 참으로 사랑의 개방적 수행이 되어 내적으로 자유로워질 때 정말 이상적이겠습니다. 단식을 사랑하라 할 만큼 단식은 중요하니 8가지 악덕중 즉 탐식, 음욕, 탐욕, 분노, 슬픔, 나태, 허영, 교만에서 보다시피 맨먼저 자리잡은 탐식의 제동에 단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탐식의 과식후에는 성욕도 기승을 부리고 수행생활에 큰 장애를 초래합니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먹는 재미없이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말이 회자될만큼 주변을 봐도 범람하는 음식점이요, 오고 가는 택배도 먹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먹는 것과 쓰레기는 비례하니 먹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 같습니다. 먹는 것이 전부라 할 만큼의 세상이지만, 또 “못먹어서가 아니라 잘 먹어서” 병도 많은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식 자체는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 수행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단식이 절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나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고 기도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나는 명품 답변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이 단식을 할 것이다.”

 

단식을 상대화 하면서 단식에도 때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시도 때도 없이 보이는 단식으로 어리석게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마라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삶의 축제를 즐기라는 것이니, 이 또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예수님이 주시는 삶의 지혜입니다. 

 

이어지는 새것과 헌것의 비유가 우리의 끊임없는 발상의 전환을, 사고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니 참 신선한 충격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새 포도주 같은 새로운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낡은 사고 방식의 부대를 새 부대로 바꾸라 말하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로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래야 꼰대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발상의 새로운 전환이 얼마나 힘든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흡사 완전히 굳어 신축성과 유연성을 상실한 극우의 보수주의자들을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 한다.”

 

나이들면 누구나 이런 극단의 보수주의자가 될 위험이 다분하며 모두의 보편적 가능성입니다. 그러니 품위있는 복음적 삶은, 개혁적 중도 보수의 삶은 얼마나 힘든 노력을 요구하는지요! 참으로 나이들어 늙어갈수록 겸손한 ‘배움의 여정’, ‘성화의 여정’에 시종여일 충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늘 새로운 포도주, 늘 새로운 부대의 삶에 오늘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가 참 좋은 답이 됩니다. 바로 어제와 오늘의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는 매주일 수요일 저녁성무일도때마다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어제 공부하며 얼마나 부요하고 풍부하며 우리의 발상의 전환에, 패러다임의 전환에 결정적 새로움을 주는지 깊이 깨닫고 배웠습니다. 

 

콜로새서 1,12-20절 까지 우주적 그리스도와 교회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이뤄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창조와 구원 업적의 웅장한 파노라마가 늘 새로운 감사와 감동, 감격을 선사하며 저절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발상의 전환을 이뤄주는 영감의 샘이 됩니다. 오늘 시간되면 매주간 수요일 저녁성무일도시 세 번째 <그리스도의 찬가>를 깊이 음미하시며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금과옥조의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성도들이 광명의 나라에서 받을 상속에 참여할 자격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시로다.”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위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하는 도다.”

“그리스도는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고, 모든 것의 시작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시고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최초로 살아나신 분이시로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의 피를 통해서 평화를 이룩하시어,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주셨도다.”

 

몇 대목을 나눴습니다만, 요한복음(1,1-18), 빌립비서(2,6-11)와 더불어 우리에게 늘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이뤄주는 콜로새서(1,12-20)의 그리스도 찬가들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늘 새 부대의 마음에, 진선미(眞善美)와 신망애(信望愛)의 새 포도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100,5).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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