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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5년 9월 30일 (화)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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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분별의 잣대이자

184666 선우경 [forgod] 스크랩 2025-09-06

2025.9.6.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콜로1,21-23 루카6,1-5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분별의 잣대이자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예수님”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오늘 화답송 시편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자 내 삶의 중심이십니다. 앞서 입당송,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시편86,5) 시편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며칠전 한 땅에 살면서도 55년만에 처음 만난 옛 교대동창친구들과 수도원에서 만났던 기억이 뒷맛 은은한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그중 한분이 아이슬란드 순례 여행중에 보내준 사진들이 고맙고 반가워 감사와 격려의 긴 댓글을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슬란드 무공해의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와 아름다움이 빛납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전하니 이 또한 복음선포입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연을 보니, 

 

‘하늘아 주님을 찬미하라, 

땅아 하늘을 찬미하라, 

바다야 주님을 찬미하라, 

건물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저절로 터져나오는 감사찬미 노래입니다. 가을은 감사와 찬미, 기도의 계절이자 공부의 계절이요 수확의 계절입니다. 정화되고 성화되어 무공해의 맑고 순수한 영혼이 되소서. 하느님의 순례자 형제님, 파이팅!”

 

즉시, “신부님 고맙습니다.”라는 답신을 받았습니다. 어제 진실한 진리의 탐구자 도반으로부터 받은, “감사드립니다. 신부님이 계시니까 제 인생이 은혜롭습니다. 우리집 수호신부님이십니다.” 이런 메시지가 더욱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해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하느님 찬미의 기쁨, 찬미의 사랑, 찬미의 행복, 찬미의 아름다움입니다. 가을이야말로 찬미의 계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찬미의 삶이 깊어질 때 하느님 중심의 삶도 날로 깊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이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케하고 마음을 정화하여 맑고 순수하게 하니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세상을, 사람을, 일상(日常)을, 교회의 전례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참 아름다운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중심이며 우리 삶의 궁극의 답이 됩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충실한 자들에 대한 말씀같습니다.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안다. 부끄러움은 어른이 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다산>

“사람이라면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서는 안된다. 부끄러운 마음이 없다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워할 일이 없다.”<맹자>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들 역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제1독서 콜로새서에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중심의 화해와 일치,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촉구하십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다만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줍니다. 복음의 희망이 참 희망이며, 이런 복음의 희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고 버텨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비벼 먹음으로 사건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이런 배고픈 살아 있는 현실을 도외시 하고, 몰인정하게도 안식일법을 잣대로 들이댑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오?”

 

주님은 참으로 기민하게 다윗의 예를 들면서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고 두둔합니다. 누구보다 다윗의 마음에 정통했던 예수님이요 바로 하느님의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에 정통했던 두분임을 깨닫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다윗의 이런 자유로운, 죄책감 없는 무죄한 행위는 그가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하느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일수록 자유롭고 무죄한 삶이요 그가 하는 행위는 다 옳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자신의 생각을 다윗의 예를 통해 알리는 주님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만고불변의 진리를 설파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법은 물론 모든 율법을 상대화 시키는 절대적 법칙의 존재가, 우리 삶의 중심이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천명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요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겠는가?” 주님을 분별의 잣대로 물으면 즉시 답이 나옵니다. 

 

새삼 그리스도 예수님 공부와 사랑의 친교가 우리의 평생과제요,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닮의 여정중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시편31,20ㄱ).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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