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어떻게 주님의 제자답게 삽니까?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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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93 선우경 [forgod] 스크랩 202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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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7.연중 제23주일
지혜9,13-18 필레9ㄴ-10.12-17 루카14,25-33
어떻게 주님의 제자답게 삽니까?
“사랑하라, 버려라, 따라라”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시편90,1)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역시 일기쓰듯 펼쳐갈 강론입니다. 모두의 공통점은 오늘 강론 주제인 ‘주님의 제자다운 삶’과 관련되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힌트를 준다는 것입니다. 아이슬란드 여행중인 안진홍 스테파노 도반으로부터의 사진이 동화속 그림처럼 아름다워 참 많이 나눴습니다. 진심이 담긴 반응의 댓글도 좋았습니다.
“눈이 정화되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힐링됐어요!”
“사진 하나하나가 가슴이 뻥뚫리는 느낌입니다. 참 좋아요. 감사합니다.”
주님을 날로 닮아가는 맑고 순수한 영혼들에 대한 감동도 이러할 것입니다.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읽은 어느 수도사제의 오늘 복음의 다음 묵상 주제 역시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제자직의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 란 말마디입니다. 역시 값싼 은총이 없듯이 값싼 제자직은 없음을, 부단한 분투의 수행과 노력이 따르는 제자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눈과 귀가 끌리는 곳보다 마음의 중심이 원하는 바를 잘 살펴보라.”<다산>
“나는 덕(德)을 좋아하기를 색(色)을 좋아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논어>
눈과 귀의 본능적 욕구가 아닌 마음의 중심인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잘 살펴보라는 말로 바꿔 이해도 무방하겠습니다. 논어의 공자는 여색(女色)보다는 덕을, 도를, 진리를 더 좋아했음을 봅니다. 정말 남은 생애, 여색보다 진리자체이신 주님을 더 밝히고 좋아하고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먹을 것을 예상하며 “무엇을 좋아하느냐?”는 수녀님의 물음에 즉시 에둘러 사양하는 마음으로, “수녀님을 좋아합니다.” 답변에 이어 즉시 정정해 드린 “주님을 좋아합니다.” 답변에 만족했고 서로 유쾌한 폭소를 터뜨린 기억이 선명합니다.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자발적 기쁨으로 따르는 주 예수님입니다.
얼마전 55년만의 교대동창친구들과의 향기로운 만남에 이어 어제도 참 좋은 분들과의 조촐하고 소박한 만남도 참 향기롭고 행복해 길이 남을 추억이 되겠습니다. 바로 개원 30주년을 맞이한 <청담성모치과의원>을 위한 축하 감사미사였습니다. 벽에 붙은 소개글이 좋아 오랫동안 그대로 놓으라 권고했습니다.
“FOR EVER GLORIA(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성모치과 탄생 3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늘 낮은 자세로 이 세상 모두의 아픔을 말끔히 치료해 주시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느낍니다. 우리도 하치양 프란치스코 원장님을 닮아가겠습니다. 원장님을 사랑하는 모임”
문형배 전임 헌법재판관의 멘토 김장하 선생을 연상케 하는 하프란치스코 원장으로 제가 치과진료받은지도 27년이 됩니다. 그대로 광야 세상 한복판 제 삶의 자리 현장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예수님의 제자직에 충실한 형제입니다. 이미 20년전에 써놨던 시도 미사강론중 축시로 나눴고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시를 좋아하는 섬세한 감성을 지닌 분이다
부드러운 품성에 강인한 의지가 빛처럼 배어나오는 분이다
그분의 일은 하나의 예술이다
때로 쉬는 날 그분은 진료 봉사를 한다
쉴틈이 별로 없는 그분이다
몸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 사는 분이다
주님 안에서 평상심平常心의 도道를 살기에 외로움도 슬며시 비켜간다
그러니 그는 예술가이고 한결같기가 세속 안의 정주 수도자이다
내 사랑하는 어느 치과의사 예찬이다”<2005.9. >
예로 들었던 내용들이 바로 오늘 강론 주제인 “어떻게 주님의 제자답게 삽니까?" 에 대한 답을 줍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주님의 제자다운 삶에 대해 나눕니다. 제1독서 지혜서가 바로 우리 인간의 부정적 실상과 우리가 따를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의 정체를 은연중 밝혀 줍니다.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저희는 세상 것도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은 것조차 거의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대로 때로 누구나 겪는 실존적 궁핍의 체험입니다. 바로 여기 혜성같이 등장하는 지혜가 바로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예비합니다.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이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로 우리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분은 이런 하느님의 지혜이자 영이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이신 인도자이자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셋으로 요약됩니다. 세 번 서두에 나오는 “누구든지” 말마디처럼 예외없이 누구나 따라야할 생명의 길, 진리의 길, 구원의 길, 성인이 되는 길,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첫째, “사랑하라!”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들 친지들을 문자 그대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보다 더 사랑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한결같은 열정으로 사랑할 때 날로 주님을 닮아 불순한 이기적 사랑은 정화되어 비로소 이웃 친지들에 대한 집착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깨끗하고 순수한 이타적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버려라!”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다 이렇게 불린 것이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 수준대로 버리면 됩니다. 무엇보다 무소유의 정신으로, 욕심없는 초연한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탐욕으로 많은 이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 갑니다. 그러니 자발적 기쁨으로 안팎으로 끊임없이 버리고 내려놓고 비우는 것입니다.
진짜 참보물인 주님을 사랑하여 발견할 때, 만날때 저절로 버리기 마련이요, 이런 이들은 세상 누구도 결코 유혹할 수 없습니다. 참보물 주님 앞에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세상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할 때 삶의 짐을, 이기적 나의 짐, 소유욕, 독점욕의 짐을 자발적으로 내려 놓게 됨으로, 버림으로, 심신도 가벼워지고 삶도 홀가분해집니다. 저절로 탐욕도 점차 줄어들면서 마음도 초연해 집니다. 최소한도의 의식주로도 만족하고 행복합니다.
셋째, “따라라!”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께 대한 독보적 사랑에서 저절로 자발적 기쁨의 버림, 비움, 내려 놓음이요, 주님을 따름입니다.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열정의 사랑에서 버림, 따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주님을 따르게 되니 삶의 궁극 목표와 방향이 주어진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면서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삶의 방향을, 삶의 꿈과 희망을, 삶의 길을 잃어 그리도 많은 마음과 정신의 병, 영혼의 병, 육신의 병입니다. 그러니 제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를 발휘하여 제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제자다운 빛나는 모범이 주님을 따르다가 수인이 된 바오로입니다. 필레몬에게 옥중에서 얻는 아들 오네시모스를 의탁하는 바오로의 사랑이 그대로 주님을 닮았습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이런 내간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를 보냅니다...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어떻게 살아야 주님의 제자답게, 예수님처럼, 바오로처럼 참으로 잘 살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안팎으로 버리고 비우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늘 바쳐도 늘 새로운 제 좌우명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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