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근 신부님_“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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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48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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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말씀(9/14) : 성 십자가 현양 축일
* 제1독서 : 민수 21, 4ㄴ-9
* 제2독서 : 필리 2, 6-11
* 복음 : 요한 3, 13-17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오늘의 강론>
오늘 우리는 “감사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희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은 지난 9월 11일에 “원장좌 수도원” 곧 ‘모원 예속수도원’에서 ‘자율수도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수도원이 창설된(2016.4.10) 지 약 9년이 지났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우리는 오늘 감사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일들이 많은 사연과 함께 훌쩍 지나갔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작품이 기억납니다.
어느 날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한 천사를 불러, 산골에 살고 있는 어느 여인의 영혼을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 천사는 혼자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어찌하여 너 혼자서 돌아왔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그 여인은 너무나 불쌍해서 도저히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여인의 남편은 어제 나무에 깔려 죽었고, 이제 막 쌍둥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를 데려오면 그 갓난아이들은 누가 키우겠습니까? 그래서 차마 그 여인을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질책하며 다시 천사에게 명령했습니다. “너는 속히 가서 그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라.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하늘나라에 되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할 수 없이 산골로 내려가 여인의 영혼을 빼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천사의 날개가 떨어지고, 천사는 그만 땅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천사는 지상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한 부인이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신발을 사러 구둣가게에 왔습니다. 천사는 두 아이를 한참 들여다 본 후에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아이들의 어머니입니까?” 그러자 부인은 “아니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6년 전의 일이었지요. 이 애들의 아버지가 숲 속에서 나무에 깔려 죽고, 어머니까지 느닷없이 죽고 말았지요. 그런데 그 당시에 젖먹이 아이를 기르고 있던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 갓난아이들을 나에게 부탁했지요. 그런데 그 다음 해 그만 내가 낳은 아이가 죽게 되었고, 결국 그래서 이 아이들이 나의 아이들이 되어 버렸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천사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흘러나왔습니다. “오!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면 그 누구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로구나! 그래, 맞아. 사람은 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는 거야” 바로 그 때 천사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곧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천사는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왔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이 날, 이 자리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사랑’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특별히, 오늘은 ‘십자가’에 대한 묵상 네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할 때라야 비로소 십자가는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하기보다 의인임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는 일은 억울하고 원망스런 일이 되고 맙니다. 부당한 처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둘째>로는 ‘십자가’는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일이요, 남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일이 아니라 물러나는 일입니다. 승리하는 일이 아니라 패배당하는 일이요,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두리로 밀려나는 일이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하게 당하는 일입니다.
<셋째>로는 ‘십자가’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곳’입니다. 그것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가 잘 되기를 바라며 하는 일이요, 그가 구원되기를 희망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일이요,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을 향하여 자신을 바치는 봉헌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승리요, 구원이 됩니다. 곧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고 진정으로 참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넷째>로는 ‘십자가’는 ‘벌어지는 일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삶은 그 어떤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내가 만들지 않아도, 만들지 않은 일들이 마구 벌어져 다그쳐옵니다. 오히려 만들고 계획하고 꾸몄던 일들은 무색하리만큼 우리를 비켜갑니다. 반면에, 불가항력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휩싸고 돕니다. 바로 그것들을 ‘사랑으로’ 마주하고 끌어안고 응답하는 일이 ‘십자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무력함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입니다.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고, 패배이지만 승리가 됩니다. 지면서도 쳐부수는 승리의 깃발이 되고, 영광의 월계관이 됩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요, 완전한 승리의 표상이요, 현양이며 영광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 삶의 의미가 되고, 우리 삶을 전환시키는 혁명이 됩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드높여, 이 고귀한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저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규칙서 머리말 30 참조). 아멘.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주님!
당신은 패배하셨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으셨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고,
추락하셨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 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추락할 줄을 알게 하소서.
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하여, 제 안에 숨겨져 있는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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