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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5년 10월 23일 (목)연중 제29주간 목요일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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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신앙생활은 온 마음과 온 삶으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185225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10-01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57-62)”

1)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예수님만’ 따르는 길입니다.

다른 길은 보지 않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냐?”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쉽든지 어렵든지 간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원래 신앙생활은 ‘완성된 생활’이 아니라,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2) “어디로 가시든지” 라는 말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함께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이 ‘율법학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8,19).

이미 율법학자로 살고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스스로 나선 것은, 또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지 않았는데도

먼저 나선 것은 훌륭한 일이긴 한데,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그의 각오가 충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는 말씀은,

잠시 앉아서 쉴 곳도 없다는 뜻이고, 어디에서나 냉대와

배척을 당하고, 박해와 미움을 받는 당신의 실제 처지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들 것이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런 처지를(삶을)

기꺼이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은,

당신의 삶은 ‘미물들’보다 더 고달픈 삶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수락도 아니고 거절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지,

아니면 기가 꺾여서 그냥 돌아섰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생각’이나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각만(말만) 하지 말고

실제로 실천해야 한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3) 두 번째 사람의 경우는, 루카복음만 보면, 아직 제자가

안 된 사람을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것으로,

그리고 그 사람이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야 한다는 이유로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을 보면, 이미 제자가 되어 있는 사람이

아버지의 장사 때문에 예수님 따르기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라는 말씀은,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복음 선포’ 라는 사도직 수행을

세속 일 때문에 중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에는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뜻은 같습니다.

‘따름’과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는 일’은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장사’ 라는 집안의 중대사를

대수롭지 않은 세속 일로 무시하셨다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오해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하고, 그 일을 포기하거나

중단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살아 있는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나 돌아가신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충실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진정한 효도입니다.>

4) 세 번째 사람은, 말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따를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표현만 보면, 우선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다음에

금방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그 사람은 말만

그렇게 하고 그냥 가족들에게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참으로 버림과 따름을

실천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입니다.

여기서 ‘뒤를 돌아보다.’ 라는 말은,

미련과 아쉬움 등을 버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따라야 합니다.

세 번째 사람의 이야기에서 엘리사 예언자의 일이

연상되는데, 엘리야 예언자가 엘리사를 제자로 불렀을 때,

엘리사는 ‘버림’과 ‘따름’을 먼저 실행한 다음에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1열왕 19,19-21).

그래서 복음에 나오는 세 번째 사람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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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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