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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5년 10월 26일 (일)연중 제30주일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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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묵상] 거꾸로 선 사다리 - 수호천사 기념일

185248 서하 [nansimba] 스크랩 2025-10-02

수호천사 기념일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태오 18.10

수호천사 기념일, 복음을 읽는 순간 무언가가 내 안에서 깨어났다. 수없이 들어왔던 구절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도 하느님 보좌 앞에 직접 접근하는 천사들의 보호를 받는다는 이 진리가 내 존재의 깊은 곳을 울렸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람을 평가하고 서열을 매기는가. 직업으로, 재산으로, 학벌로, 나이로, 심지어 신앙의 깊이로까지. 나 역시 그런 세상의 눈으로 사람을 보아온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길가에 앉아 있는 노숙인을 지나칠 때, 장애를 가진 이를 만날 때, 학교에서 소외된 아이를 볼 때, 나는 그들을 정말로 '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시선을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은 아닐까.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바로 그 사람들,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그들에게 천사가 있다고. 그것도 하느님의 얼굴을 '늘' 보는 천사들이라고.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이것은 존재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선언이다. 땅에서의 서열과 하늘에서의 서열이 완전히 뒤집혀 있다는 것, 아니 애초에 하느님께는 그런 서열 자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은총이다. 나의 존재는 내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무엇을 소유했는지와 무관하게 하느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는 '존재하도록' 불림받았고, 이 불림 자체가 사랑의 행위다.

나의 본질은 행위(doing)에 있지 않고 존재(being)에 있다. 그리고 이 존재는 홀로 독립적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주적 연대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수호천사의 존재는 바로 이 진리를 가시화한다. 천사는 나와 하느님 사이의 매개가 아니다. 오히려 천사는 내가 이미 하느님의 시선 안에 있다는 것,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향해 끊임없이 흘러오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표징이다. 하느님의 눈길이 나를 존재하게 하고, 나를 지탱하며, 나를 사랑으로 채운다. 수호천사는 이 하느님의 눈길이 구체적 형태를 띤 것이다.

 

그렇다면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예수님의 경고는 어떤 의미인가. 이것은 단순히 친절하게 대하라는 도덕적 권고가 아니다. 이것은 존재론적 진리에 대한 선언이다. 누군가를 업신여긴다는 것은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그 사람이 하느님의 시선 안에 있다는 것,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우주적 연대의 소중한 일부라는 것을 무시하는 행위다. 나 혼자만의 좁은 기준으로 타인의 존재를 재단하려는 오만이다.

 

나는 문득 깨닫는다. 내가 누군가를 무시할 때, 나는 그저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것임을. 하느님의 얼굴을 늘 보는 천사들이 돌보는 이를 내가 업신여긴다면, 나는 하느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짓밟는 것이다.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동시에 이 말씀은 나 자신에 대한 위로이기도 하다. 나 역시 작은 사람이다. 나 역시 내 한계와 약함, 실패와 상처로 가득하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나는 얼마나 부족한가.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바로 그런 내게 천사가 있다고. 그 천사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고. 나의 가치는 내 성취나 업적에 달려 있지 않다.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미 사랑받고 있고, 하늘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역설일 것이다. 세상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다. 성공한 자가 실패한 자를 내려다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내려다본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거꾸로다. 하느님은 아래에서 위를 바라본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작은 이들의 편에서 세상을 보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고,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이고 관계적인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린이처럼 나는 타자를 필요로 하고,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 이 필요가 약함이 아니라 진실이다. 이 진실을 받아들일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갈증에서,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진다.

 

오늘 나는 기도한다. 작은 이들을 하느님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내 옆을 지나가는 모든 이 안에서, 특별히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들의 천사가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면, 나도 그들의 얼굴 안에서 하느님을 뵐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기도한다. 나 자신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내 약함과 작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만나시는 바로 그 자리임을 깨달을 수 있게 해달라고. 내게도 천사가 있고, 그 천사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있다는 이 놀라운 진리를 내 존재 깊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수호천사 기념일, 이 날은 단순히 천사를 기억하는 날이 아니다. 이 날은 모든 존재의 소중함을 기억하는 날이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지를 배우는 날이다. 그리고 그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하는 날이다. 길 위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내가 만나는 모든 이 안에 천사의 동행이 있음을 기억하며, 그들을 결코 업신여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는 날이다.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의 천사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늘 본다. 이 말씀이 오늘 내 안에 새겨진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것이 단순한 신심의 가르침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진실임을.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눈동자 안에 있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숨 쉬며, 하느님의 돌보심 안에서 존재한다. 이것을 기억하며 사는 것, 그것이 신앙이고, 그것이 구원이며, 그것이 이미 시작된 하늘 나라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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