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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5년 10월 27일 (월)연중 제30주간 월요일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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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185302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10-04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0,17-24: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파견 사명을 마치고 돌아와 기쁨에 가득 차 주님께 보고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이 물러나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은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기쁨을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주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즉, 기적과 능력이 아니라 구원받은 신분이 참된 기쁨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그분의 선물을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기뻐하는 사람이다.”(De doctrina christiana I,22). 제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 안에 속했다는 사실이 진정한 이유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성부께 감사를 드리며 기도하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를 드립니다.”(21절). 이는 겸손한 이들에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지혜를 보여준다. 교리서도 “신앙은 겸손한 마음을 요구한다.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에 이끌리지 않고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을 수 없다.”(153항)고 가르친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했지만,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계시는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의 사람들, 곧 “철부지들”에게 드러났다. 성 예로니모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하느님의 비밀은 오만한 이들에게는 닫혀 있고, 단순한 이들의 가슴에 활짝 열려 있다.”(Commentarius in Matthaeum, 11,25)고 강조했다. 

 

우리의 눈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세상의 성공이나 업적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며, 세상 모든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기쁨의 근원이다. 

 

오늘 하루, 우리 안에 일어나는 작은 성취나 기쁨보다도,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셨다는 더 큰 기쁨을 묵상하며 살아가도록 하여야겠다. 아멘. 

 

조명연 신부님_2025년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에서 비판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비판을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판받는 사람이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화를 내기도 하고 똑같이 비판하기 마련입니다. 과연 이런 방어적인 태도가 문제의 해결을 가져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오히려 부드럽고 다정하게 다가서야 가능했습니다.

 

특히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은 늘 평가되는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 행동, 심지어 표정까지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매번 조심해야 합니다. 어쩌면 함부로 나를 평가한다고 억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 있기에 평가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평가가 더 나은 내가 되는 자극제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런 마음을 가져야 부드럽고 다정하게 사람들과 관계할 수가 있습니다. 나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타인과의 화합으로 더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도 비판받고 평가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판과 평가에도 사랑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부드러움과 다정함을 계속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되었던 일흔두 제자가 성공적인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기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지닌 권능으로 악의 세력을 이겼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카 10,18)라고 말씀하시지요. 제자들의 이 작은 승리가 사탄의 권세가 결정적으로 꺾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에 대항하는 노력을 통해 하늘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이름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은 철저하게 사랑에 있습니다. 주님을 배제한 채, 자기 능력만을 내세운다면 또 세상에서 말하는 외적인 성공만을 내세운다면 악을 물리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루카 10,20)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이는 전적인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이보다 더 크고 영원한 기쁨은 없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진짜 성공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길 잃음의 연속입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기를(허준이).

 

한상우 신부님_"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오늘을 사는

우리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보여준

단순함과 비움,

사랑과 나눔의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와

힘은

불완전하고

덧없습니다. 

 

가난을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섭리에

의지하게 됩니다. 

 

가난은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행위입니다. 

 

소유를 버릴수록

오히려

더 큰 자유가

열립니다. 

 

가난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채워짐입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을 때,

모든 것이

형제가 되고

모든 것이

자매가 됩니다. 

 

가난은

자기 힘이나

재물에

기대지 않고,

하느님의 섭리에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소유와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단순하고

겸손한 삶을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과 일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먼 존재가 아닌,

가까이 계신

형제, 친구처럼

체험했습니다. 

 

가난과

겸손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소유와 집착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본질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안에서

가난을 선택하며,

모든 피조물과

사랑으로 연대하고,

삶으로

하느님 나라를

증거한 성인입니다. 

 

삶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은

다름아닌

단순함과

비움입니다.

 

이병우 신부님_<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10.4) 

 

"너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기쁨!' 

 

오늘 복음(루카10,17-24)의 제목은 '일흔 두 제자가 돌아오다.'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오늘은 생태계의 주보 성인이시며, 평화의 사도요,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제자요 형제였던 토마스 첼라노는 사부의 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바라던 바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하던 바다. 그러더니 거룩한 사부님은 환희에 넘쳐 자신이 방금 들은 영혼에 유익한 말을 완수하기 위해 서둘렀다. 그는 즉시 발에서 신발을 벗어버리고, 손에 지팡이를 치워 버리며, 한 벌의 옷에 만족하고, 허리띠는 가느다란 새끼줄로 바꾸어 버렸다."(1첼라22) 

 

"프란치스코의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바람과 최고의 결심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었고,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열의를 다하여 애타게 갈망하는 온전한 정신과 뜨겁게 타오르는 온전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었다."(1첼라84) 

 

"그의 마음에 가득찬 것이 입으로 나왔고, 그의 온 존재를 채우고 있는 빛을 받은 사랑의 샘이 밖으로 흘러넘쳤다. 어디에서나 그는 늘 예수께 사로잡혀 있었다.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있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지체들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1첼라115) 

 

이것이 성 프란치스코의 본질이며 전부입니다.

이것이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이며 기쁨입니다.

이것이 성 프란치스코를 좋아하며 따라가는 이들의 본질이며 삶입니다. 

 

저는 이런 프란치스코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이런 프란치스코를 닮으려고 노력합니다. 

 

만인의 형제인 프란치스코를 사랑하고, 닮으려고 노력합시다! 

 

(~ 1사무28,2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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