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7주간 토요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8
오히려 복된 이들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목소리를 높인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그녀의 말은 진심 어린 찬사였을 것이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의 가치는 주로 어머니 역할, 특히 훌륭한 아들을 낳고 키우는 것으로 평가되었기에 "훌륭한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복되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생각을 한다. 좋은 자녀를 둔 부모, 훌륭한 스승을 만난 제자, 성공한 사람 곁에 있는 이들을 부러워하곤 한다. 누군가와의 관계, 어떤 위치에 있느냐로 때론 우리의 가치를 재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기대를 뒤집는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칭찬을 부정하시지 않으시면서 진정한 복됨이 ‘누구와의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살아내는 일’에 있음을 드러내셨다.
당시 랍비들은 여성을 제자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당에서도 분리된 공간에 있었고 공식적인 종교 교육에서도 배제되었으며 랍비와 여성이 공개적으로 대화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공개적으로 여성을 제자로 초대하신다.
이런 새로운 권위는 당시 여성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했고, 성경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 수산나, 요안나 등이 예수님을 따르며 섬겼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나자로의 누이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루카 10,39)있었다. 당시 랍비의 발치에 앉는 것은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고, 예수님은 이를 "더 좋은 몫"이라고 인정했다. 언니인 마르타는 "저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요한 11,27) 라고 고백하는데 이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동등한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공개적으로 대화하고 신학적 토론을 나누셨고 (요한 4장) 그녀는 마을로 가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 관습을 깨고 여성들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공개적으로 신학적 대화를 나누셨으며 여성들을 부활의 증인, 선교사로 삼으셨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이 더욱 의미있게 다가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8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조차도 단순히 '예수님을 낳았기 때문에' 복되신 것이 아니었다.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셨기에 복되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였기에 복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여성은 어머니 역할로만 가치 있다는 관념을 깨고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하느님 말씀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혁명적 메시지를 주신 것이다.
이 가르침에 따라 초대 교회에서는 여성들이 활발히 그 역할을 한다.
바오로 서간에서 브리스킬라, 율리아, 포이베 등 여성 협력자들이 여럿 언급되고, 브리스킬라는 아폴로스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도 18,26)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여성의 모습은 어떠한가.
가톨릭 교회 안에 여성 신자 비율이 남성보다 높음에도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본다. 교회 안에서의 주교회의나 교구 평의회 등 의사결정 구조 안에 여성의 목소리가 반영되고 있는가 생각해 본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바티칸 부처에 여성 고위직 임명을 확대하셨고, 2023년 세계 시노드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진 정회원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오늘 복음을 통해, 나는 여성의 존엄을 들어 올리시고 제자직의 문을 활짝 여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다.
한 여성으로서, 그분의 시선 안에서 새로운 교회의 바람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