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12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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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61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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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
[말씀]
■ 제1독서(2열왕 5,14-17)
구약 전승은 기원전 9세기의 대표적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에 관한 수많은 이적 기사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시리아의 사령관 나아만의 치유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하느님 야훼께 대한 경신례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시절, 나병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나아만이라는 이방인이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함과 아울러 감사의 예를 올리고자 합니다. 구원은 이제 이스라엘을 벗어나 이방인들을 향합니다.
■ 제2독서(2티모 2,8-13)
사도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바오로는 수많은 적대자와 논쟁을 벌여야 했으며, 때로는 그들에 의해 감옥에 갇히는 고통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적대자들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대상은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교 신자들,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전파와 구원 가능성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식을 보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누구도 하느님의 말씀을 가두어놓을 수 없다는 확신 하에 갖은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데 앞장섭니다.
■ 복음(루카 17,11-19)
나병에서 치유된 사람은 열 사람이었으나, 치유가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율법에 따라 사제에게 깨끗해진 몸을 보이고 치유를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했던 유다인들과는 달리, 이방인으로 취급되던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 되돌아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만 준수하면 그만이라는 사고에 젖어 있던 유다인을 꾸짖으시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할 줄 아는 믿음으로 영적인 나병까지 치유 받은 이방인을 신앙의 모범으로 세우십니다.
[새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 축복의 땅으로 선사 받고서, 다윗 시대를 이어 솔로몬 시대에 이 땅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계약의 궤를 모시기 위해 성전을 건축한 이래, 하느님은 이 성전 또는 이스라엘 땅에 매여 있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며, 구원 또한 이 땅에서만 가능하다는 믿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 지역은 하느님의 말씀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구원의 가능성이 배제되기 시작했으며, 이스라엘 땅과 이 땅에 사는 백성만이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구원관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자유는 인간의 잘못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제한받는 자유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늘 성경의 말씀들은 모두 이방인들의 구원에 관한 말씀, 오히려 그들이 구원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음을 일러주는 말씀들입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나 동족에 의해 이방인으로 취급되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러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확신에 찬 가르침대로, 하느님의 말씀은 어느 장소 또는 누구에게 매여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말씀입니다. 유다인들처럼 가톨릭 신자라는 자긍심을 넘어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가두어놓을 수 있다는 교만 속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위의 더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그들 모두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다져나가는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7,11-19: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마리아인
1. 감사로 드러나는 믿음
오늘 전례 독서의 공통 주제는 하느님의 은혜 앞에서의 감사와 믿음이다. 제1독서에서 시리아 장군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병에서 치유되고, 그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고백한다.(2열왕 5,14-17). 복음에서 사마리아인은 치유를 받은 뒤 다시 돌아와 하느님께 찬미를 드림으로써, 단순한 육체적 치유를 넘어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을 드러내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드린다고 할 때, 그것은 새로운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드리는 것이다.”(Sermo 17,2) 따라서 감사는 신앙인의 삶 그 자체이며, 은총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다.
2. 믿음과 감사의 내적 연관성
예수님께서는 아홉 명의 유다인 나병환자와 달리, 외국인인 사마리아인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여기서 믿음은 단순한 치유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감사로 표현되는 신앙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감사하지 않는 영혼은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아도 결코 충만함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감사하는 영혼은 작은 은혜 속에서도 하늘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본다.”(Homilia in Matthaeum 25,4) 즉,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은총을 ‘자기 권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무상적 선물’로 받아들인다.
3. 감사와 성체성사의 신비
교회의 감사 행위는 성체성사에서 절정에 이른다. 실제로 Eucharistia라는 단어 자체가 “감사”를 의미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구세주의 파스카 신비가 성찬례 안에서 끊임없이 현존하도록 제정되었으며, 이로써 교회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은총을 끊임없이 감사드린다.”(전례 47항) 성체성사는 단순히 의무적인 전례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삶의 정점이며, 사마리아인의 감사 행위가 전례적으로 실현되는 자리이다.
4. 신앙인의 삶: 모든 것을 은총으로
오늘 복음은 또한 우리에게 경고한다. 아홉 명의 나병환자처럼 은총을 당연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은 이를 분명히 한다. “우리는 믿음이 없어도 그분은 한결같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2티모 2,13)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은 결코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무상적이며 자유로운 사랑의 선물이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한 대로, “은총은 갚을 수 없는 사랑의 선물이다. 오직 감사만이 은총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응답이다.”(De gratia Christi, 8)
결론
사마리아인의 감사는 단순한 예의범절이 아니라, 믿음의 구체적 표현이자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 역시 하느님 앞에서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며, 성체성사의 감사 안에서 삶 전체를 감사드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실천 포인트
1. 작은 은혜도 당연시하지 않고 감사로 응답하자. 2. 성체성사 안에서 감사의 삶을 새롭게 하자. 3. 신앙의 본질은 ‘공로’가 아니라 ‘은총과 감사’임을 기억하자.
전삼용 신부님_내가 소원을 하나만 쓸 수 있다면?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삶의 진정한 행복이 되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 깊이 성찰하고자 합니다.
재산이나 명예 같은 외적인 변화가 행복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주는 행복은 3개월을 넘지 못하고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아이에게 부모가 행복의 전부인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과 그분이 주시는 은총으로만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자존감’이라고 하고, 이것이 우리 모두의 ‘기본 행복 수준’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행복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나의 가치를 깨닫는
‘자존감’이 높아지는 동시에, 그것을 주시는 분에 대한 감사, 곧 ‘겸손’이 함께 커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마치 은총을 담는 그릇과 같아서 그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은총은 청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마치 김치가 우리 삶의 은총이라면 김치냉장고가 겸손입니다.
겸손이 없으면 김치가 상해서 오히려 우리 건강에 좋지 않게 됩니다.
일본의 유명 여배우 사와지리 에리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은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그녀는 13세에 연예계에 데뷔하여 빠르게 톱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처음에는 모델로서, 그다음엔 TV 배우로서, 그다음엔 가수로서도 노래를 부르자마자 오리콘 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이른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성공은 그녀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업계에서는 그녀의 안 좋은 인성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고, 급기야 2007년 한 영화 무대인사에서
기분이 “별로!”라는 발언(일명 ‘베쯔니 사건’)을 하여 대중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이후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모든 활동을 중단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나이 많은 영화감독과 결혼했지만, 당연히 그 관계가 오래갈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은총만 바라고 그릇은 준비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시지만 감사하러 온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치유라는 기적 자체에 목적을 두었고, 당연히 자신들이 노력한 결과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은총을 받기 전과 받은 후가 같아야 합니다. 똑같이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되고, 받기 전이나 후나 다 ‘감사와 찬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이 독이 되어 주님께서 계속 주실 수가 없습니다.
병이 치유되고도 감사하지 않은 나머지 아홉은 영혼의 나병으로 더 교만하여 하늘나라에서 더 멀어졌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누구나 겪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어 유학을 다시 나가라고 했을 때 마음 안에서는 큰 불만이 일었습니다.
공부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어 신자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데 또다시 외국인 학생으로 짓눌리며 살기가 너무 싫었습니다.
결국 몸으로는 순종한다고 로마로 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한국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을 무렵 터키 성지순례를 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바이러스가 들어가 한쪽 귀의 청력이 손상되었습니다.
결국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제야 잘 들을 수 있음에 단 한 번도 감사한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데 교회에서 다 시켜주는데도 신세 한탄만 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은총을 충분히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감사하고 있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총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청해야 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드리는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아내를 바꾸어달라고 청했다가 아내가 죽자, 사람들의 칭송을 듣고는 다시 살려달라고 청했습니다.
마지막 소원이 남자, 그는 예수님께 무엇을 청해야 할지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처지에서 감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여라.”
우리에게 마지막 소원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바로 ‘겸손’입니다.
이런 마음이 은총을 받게 합니다.
겸손은 집을 짓는 바탕과 같아서 겸손이 없으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게 됩니다.
이러한 지혜는 세상의 성공한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가수 비는 박진영이 자신에게 “네가 아무리 잘 돼도 저 끝에 있는 막내한테, 세트를 만드는 망치질하시는 분한테 제일 잘해야 한다.” 라고 가르쳤던 것을 기억합니다.
박진영은 비에게 성공이라는 은총을 주기 전에, 먼저 겸손이라는 그릇부터 준비시킨 것입니다.
메이저리거 오타니 쇼헤이가 경기장에서 쓰레기를 줍는 것, 삼성 이재용 회장이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 그리고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나는 미래를 알 수 없다.”라는 겸손한 자세로 장기 투자를 고집하여 노년에 더 큰 부를 이룬 것 모두, 더 큰 은총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겸손의 그릇을 키워나가는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동네에 가끔 뻥튀기 장수 아저씨가 리어카를 끌고 오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분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얼마나 큰 은총을 주실 수 있는지
몰랐던 거지요.
어느 날, 그 아저씨가 동네 아이들에게 공짜로 뻥튀기를 나눠준다고 소리쳤습니다.
저는 ‘공짜라니!’ 하며 그냥 맨손으로 터덜터덜 나갔지만, 다른 친구들은 저마다 커다란 바가지나
대야를 들고 달려 나왔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저렇게 욕심을 부리다니!’
그러나 잠시 후, 저는 제 작은 손바닥에 몇 개만 받았을 뿐이지만, 뻥튀기 아저씨는 친구들이 가져온 그릇마다 가득가득 뻥튀기를 채워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 내가 주님을 알려고 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더 큰 은총을 받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한 소녀가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구해줍니다.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말입니다.
나비는 천사로 변해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소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라고 하자 귓가에 무언가 속삭이고 사라졌습니다.
소녀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임종 직전, 그녀는 행복의 비결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속삭였어.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감사하다고 말하면 평생 행복할 거예요.’ 그때부터 나는 무슨 일이든지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던 거야.
사실 천사가 내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니야. 누구든지 만족한 줄 알고 매사에 감사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신앙 여정은 바로 이 행복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너는 내 피로 값을 치른 존귀한 존재다.”라는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줍니다.
동시에,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분 앞에서 우리는 더없이 작아지는 깊은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이 두 가지를 붙들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은총이 은총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겸손’을 붙들고 청하고 끝까지 키워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한상우 신부님_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자연과 함께
모든 것이
익어가는
이 가을이
우리의 평화와
감사도
잘 익어가기를
기도드립니다.
치유의 본질은
감사이며
은총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진정한 구원의
시작입니다.
감사는
관계를
회복시키고,
삶의 상처까지도
살아야 할
의미로 바꾸어
놓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우리의
진정한 감사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감사로 드러납니다.
온전히 새로워지는
살아 있는 관계의
믿음입니다.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살리는
힘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감사의 기쁨으로
드러납니다.
감사 없는
봉사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감사는 치유를
완성시키고
치유는 감사를
깊게 합니다.
믿음은 감사를
낳습니다.
믿음 없는 감사는
일시적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을 완성시키고,
믿음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치유와 구원을
체험합니다.
오늘은
감사의 마음을
새기고 기리는
군인 주일입니다.
나라와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군인들의 믿음과
용기에 감사드립니다.
군인들의
신뢰와 노고 안에서
우리는 평화와
희망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공동체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 것임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건강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뜻깊은
감사의 주일
되십시오.
조명연 신부님_고대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는 반대가 많았고, 그 반대자로부터 테러를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상 안에서 언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가득했습니다. 어디서 올지 모를 암살자에 대한 두려움에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도록 사방팔방에 거울을 설치했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거울을 통해 암살자를 막을 수 있었을까요? 아쉽게도 그는 결국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거울이 암살자를 숨지 못하게 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 암살자는 그가 침실에서 자고 있을 때 암살한 것입니다. 깨어 있었다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거울을 통해 암살자를 발견하고 막을 수 있었겠지만, 눈 뜨고 잘 수 없기에 거울의 효과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세상이 나를 지켜주고, 나의 행복을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를 지켜주고 참 행복을 가져다주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이 세상 삶은 채 100년도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시간은 하느님 나라에서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존재가 중요하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만 집중하게 되면 주님께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행복도 멀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병이라는 끔찍한 병으로 고통스러운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나병 환자는 율법에 따라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기에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하고 이르십니다. 즉시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따라 나병이 나았을 때 행해야 할 절차를 먼저 이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만 믿은 사람만이 사제에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 모두 사제에게 갑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이 중에 단 한 명만, 그것도 유다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아홉 명은 ‘치유’라는 선물 자체에만 만족하여 서둘러 사제에게 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병이 낫는 것, 즉 사회적 지위를 회복하는 데에만 관심 있을 뿐, 그 은총을 베풀어주신 분과의 인격적인 관계에는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세상의 것과 분명 구별되는 것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기준만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라면서 영적인 구원을 이야기하십니다. 이제는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삶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준은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참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장애는 불편하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다(헬렌 켈러).
이병우 신부님_"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17,18)
청하고 받고 감사드리기!
오늘 복음(루카17,11-19)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이 다가와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 이렇게 소리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7,13)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17,14) 하고 이르십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나병이 나은 열 명 중 한 사람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외국인(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17,17-18) 하시면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고, 마침내는 죽음 저 너머에서 영원히 부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2티모2,8/제2독서)
이제와 영원한 부활을 위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이 자비에 힘입어 다시 부활하고, 자비를 베풀어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청하고, 받고, 감사드리기!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기!
이것이 바로 매일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이며 본질입니다.
합천성당은 오늘 천호성지로 본당설립 93주년 기념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성지순례 중에 기도하겠습니다.
(~ 2사무16,2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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