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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1)군사 독재와 개신교 종교 분열

185468 우홍기 [justice24] 스크랩 2025-10-13

군사 독재 정권은 국민들을 될 수 있으면 바보로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만들 수 있는가

어떤 공부를 시키더라도

용어 개념 정의를 부실하게 시켜 놓고

그 다음에 유클리드 기하학의 논리의 출발인 공리 체계(axiomatic system)

이런 것들을 엉망으로 시켜 놓고

그 다음으로 빨리 빨리 넘어가면 됩니다.

 

그러니까 시작 부분이 용어 개념 정의에서 출발하거나

공리 체계의 접근 식으로 사전에 합의한 어떤 개념이나 전제 조건들에 대한

학습을 부실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 마음대로 전개하는 것이죠

그러면 처음에는 알아 듣는 것 같지만

이제 그 용어 개념 정의가 약하면

자기의 생각에서 출발하는 판단들

사고 전개 과정이 원천적으로 부실해질 수 밖에 없는

논리적 절차적 정당성을 자기 주체적으로 만들어가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 첫 시작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대화가 다 끝난 다음에 다시 했던 질문을 또 해야 하는

그런 상태로 남죠

그런데 처음에는 개신교 분들이 대화해보면

그런 성향이 나왔는데

그게 세뇌된 수준이어서라고 정도까지만 생각했었는데

그 분들이 전두환식 교육을 받아서

학력고사 세대들은 문제가 뭐냐 하면

용어 개념 정의 단계가 다 부실해서

자기가 뭘 하는지 몰라도 그 당시 대입인 학력고사에서

고득점 받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실력이 들통이 나려면 문제가 요구하는 답이

그 답이 나오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단계

그러면서도 이전에 가보지 않은 과정을 거칠 때

정보를 인출하는 힘

이런 것들이 함께 측정이 되는 것이 1차적으로라도 전제 되고 요구되는가

그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로 다음 단계

그러니 고득점을 내서 명문대를 입학을 했어도

그 부실한 실력이 들통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명문대생은 되셨어도

문제이고

아닌 분들은 더 문제가 크겠죠

그나마..

 

수학이 대표적으로

용어 개념 정의 그 출발점을 명확히 하고 있는 분들이냐

아니냐는 논리적 절차적 정당성을 중시하는 토론에서

그 역량이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학교 수학의 교육적 기초

서울대학교 출판부

우정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학과 교수님의 저서들을 보면

수학교육과 민주시민의 양성 간의 관계가 나오고

신학을 하신다면 그런 사고는 아무래도 필수적인데

군사 독재 기간을 거치면서 개신교가 보인 목사 양성 과정에 따른 여러 부실은

그런 용어 개념 정의를 명확히 해서 논리적 절차적 사고 단계를 거치는

그런 훈련이 안되신 분들이

생활이 어렵고 힘드시다보니까

대강 공부하시면 이제 그런 훈련이 안되시니까

율법이냐 믿음이냐에서

그 용어 개념 정의를 명확히 하시고

그 정의를 암기하시느냐

그걸 안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개신교 분들이 그 부분이 약하신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율법도 믿음도

둘 다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데

율법은 하라는 대로 해라

그러니 실천이 요구되고

믿음도 행동하는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이든

실천이 포함되어 있는 정의를 가진 믿음입니다.

여기에서 정의는 우리 말로 뜻을 말하는 것이고

믿음은 실천을 요구하는 믿음인데

율법이냐 믿음이냐에서는

다시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라

이것이 율법이 되느냐 믿음이 되느냐는

율법학자들처럼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사람 고치시는 예수님께

딴지 걸면 율법이고

그게 아니라 손 오그라든 사람 치료해주면

그건 여전히 안식일이 거룩히 지내지는

보내고 있는 믿음이 되는

그러니까 아픈 사람 고칠 수 있는 병원의 의사 선생님

께서 이를 외면하지 않는 가운데

혹은 안식일에 배고파서 벼 이삭 베어 먹은 예수님 제자들을 비난하지 않으면

즉 그래서 배고프면 안식일이지만 벼 이삭 베어다가 밥해 먹는

그런 것은 허용하는 융통성

보다는 아마도 인간을 보다 더 지향하여

사람이 살아가는데 사람을 살리는데 더 주목하는 안식일

그것이 우리에게는 지금 주일로 지내고 있는 것인데

그런 잘못된 실천의 요구로 인간에게 고통이나 짐을 주면

눈에 보이는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요한 1서의 말씀

1요한 4,2에 근거해서

보아야 한다.

차례를 지낼 때 어려서 어린이들이 먼저 좀 집어 먹었다고 해서

그 어린이가 너무 배고파서..그런 날 있잖아요

길어져서 차례가 길어져서 너무 배고픈다 벌써 10시가 넘어서

그럴 때 몰래 집어 먹은 어린이들이 그렇게 뭐 큰 잘못했다고 혼나지 않았던

우리 집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보면

그런 제대로 된 믿음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공동번역에 나오는 표현 방식으로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믿음이 되지 않는다

로마 10,9만 보면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에 걸리니까

입으로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어서 구원을 얻습니다

그 로마 10,9에 난리가 나서

거기에 마음으로 믿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실천이 빠지는 것이지 그래 버리면 안된다..

실제로 정의를 먼저 쓰고 논리적 절차적 사고를 전개하여 작성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변 문장들을 가져와서 그 해당 문장에 등장한 그 용어 개념 정의를 살펴야 한다

 

맥락이 서로 도와서 그 객체라고 해야 하나

그 주변에서 도와서 그 어느 용어를 정의하고 있게 된다

로마 10,17은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님의 말씀으로 구성된다

그게 예수님 말씀을 들어서 생기는 믿음이어야 믿음이다

그런 결론에 이르게 하고 있어서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복음서 본문에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순되지 않는 일관성 있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성경 본문에서 여기 저기에서 걸림돌 걸려 넘어지듯 하면

용어 개념 정의를 잘못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게 아니라 어디에서도 걸림이 없으면

제대로 된 믿음의 정의를 확보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걸림이 발생하는 것은

전하의 운동에서 전자기장이 왜곡되어 흐르는 어떤 움직임

전하의 운동과 닮아 있으나

2차원이든 3차원이든

중력장을 평평한 것으로 본다든지

아니면 테니스장에서 테니스공을 바닥에서 굴릴 때

울퉁 불퉁해서 공이 되튀어 오르거나 걸리거나

그런 것 없이 계속 가는 장면들에서 그 바닥의 평평함이 연상되는

제대로된 믿음의 정의가 확보된 상황이 되면

왜곡된 전자기장을 흘러다니는 전하의 운동과는 달라 보인다는 비유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개신교 이 분들은

행동하는 믿음

김대중 토머스 모어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님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표현되기도 한

그 믿음을 머리에 믿음의 정의로 정해 놓고 대화하시나

 

여기 야고 2,26-27에서 실천하여야 하지 않느냐

그래도 그것에 동의하시다가도

대화를 진행하는 중에

 

그 정의가 인출되는 것이 반복적으로 유지 되시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에서 나오는 것에서

실천이 빠진다고 하는 것의 도움을 받아서

믿음의 정의가 도로 개신교식으로 돌아서 있는 가운데

율법이냐 믿음이냐에서

그런 하나의 일정한 장에

그 친숙도가 높은 믿음의 정의에서 실천은 다시 빠지는 개신교의 믿음의 정의를

뇌에서 인출해서 대화하고 있는 것이 관찰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용어 개념의 정의를 암기까지하고 그 친숙도가 올라간 상황에서만

논리적 절차적 정당성을 밟아 나가는 그런 사고의 전개의 중요성을

배우고 훈련 받으신 경험이 그 이후 세대에 비해 매우 적고

가톨릭 신자들과는 달리

고해성사가 일단 친숙도 있는 정보로 뇌에 활성화 되어 있지 않은 채

대화에 나선다는 것이 그 분들이 매번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는데 실제로 실패하는 그 이유로 관찰되었습니다.

고해성사를 안보시고 부정하시고 사시니까

 

 

죄의 용서를 거저 받죠 고해성사에서

그 경험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신 분들은 늘 빠져 있어서

정보의 인출에서 개신교 식으로 실천해야 하는 상황에서 실천을 거부한 상황의 믿음은

고해성사 거리이고

그것을 용서 받는 것은 고해성사 보면 거저 용서 받는 것인데

마르틴 루터는 그게 힘들었던 것이죠

매일 4시간 해야 되니까

 

그게 거저 얻어지는거냐

하면서 속이 상할 때

실천이 귀찮은 거죠

신경질 난다

루터가 그렇지

우리가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 그 말에서

그 말 한마디가 공짜로 뭘 얻은 천 냥이지

천 냥에 무슨 이자 갚은 것은 아니잖아요?

그 정의에서 율법은 실천만 강조된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실천이 빠진 믿음이라는  오개념이 있고

늘 이 부분에서 대화하실 때 천주교 신자와는 달리

동일한 믿음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가톨릭의 2대 교황님이 아마 야고보 교황님이신데

야고보서에 그리스에 한 2천 년 전에 논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그 때 끝냈는데

개신교가 고해성사를 빼고 이야기 하니까

그것을 부정하고 하면서 생각해온 한 508년

내년이면 509년이죠

그런 기간 동안 누적된 그런 잘못된 용어 개념 정의의 믿음의 정의의

정보 인출의 역사가 그 오류의 역사가 있으신 것입니다

거기에 갇히시니까 구원은 거저 오는데

실천을 왜 하나

그건 율법이다

이게 전부 엉터리 용어 개념 정의를 담고 있는 정보들을 인출하신 것입니다.

그것에서 스스로 빠져 나오는 교육을 받으신 것도 아니고

그런 교육을 스스로 자습으로 해낸다든지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최근 뉴스에도 좀 되었지만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님께서 설명을 하시고 나서

더 쉽게 설명을 부탁드린 학생에게

이를 거부하시면서 네가 생각해 봐

하셨더니

네가 지금 나하고 해보자는 거냐

하면서 대들었다..

영어로 이야기 하면 be coddled with

애들을 유약하게 키워 놓은 것이죠..

그런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사실은 전두환식 교육의 폐해가 결정해 오고 있고

그 용어 개념이 불확실하니 서로 대화하면서도 이견 차를 보이면서도

자기들이 왜 그런 상황에 빠져 있는지 모르고

그러니 1만 여 개로 갈려 나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래서 우리가 이항정리를 생각하면서 몇 개의 교파가 가능할까

그런 답을 다음 글에서 찾아온 것을 답해보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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