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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5년 11월 4일 (화)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가톨릭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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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3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185494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10-13

김건태 신부님_십자가는 회개와 지혜의 표징

 

 

오늘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한 세대로 평가하십니다표징을 요구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복음 전파 사명에 뛰어드시면서예수님은 말씀과 행적으로 제자들과 군중을 가르치셨으며그 가르침의 목적은 사람들이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그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그 가르침을 보증하기 위하여 그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아직도 표징을 요구하고 있으니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꼭 한 가지회개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많은 예언자를 만납니다우리가 알고 있는 예언자들은 모두 참된 예언자들이지만거짓 예언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참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름할 때그 잣대는 회개입니다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지 못할 때이 백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예언자가 파견된다는 점에서예언자의 설교 주제는 회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그 예언자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파견되어 물론 이러한 파견을 모면하고자 인간적 수단을 모색하다가 결국 자신이 먼저 회개하여 -, 이방인들을 회개의 길로 이끈 요나는 예외적인 위대한 인물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인물이었습니다따라서 요나가 이 악한 세대에게 주어질 유일한 표징이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이 세대가 이미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 믿음이 없는 사람들곧 이방인들로 전락했다는 판단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역사는 외세로부터 나라를 굳건히 하기 위해 전사로 한 생을 살았던 다윗의 뒤를 이어솔로몬은 지혜로 나라를 번성하게 한 인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솔로몬은 하느님께 부와 명예가 아니라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곧 지혜를 청함으로써 지혜를 대표하는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1열왕 3,4-14). 다시 말해서솔로몬의 지혜는 지혜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베푸신 선물이기에이 선물을 잘 간직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이 전제되어야 함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이렇게 본다면요나의 표징과 마찬가지로솔로몬의 지혜에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요나보다 더 큰 이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있습니다이방인들곧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회개의 길로 이끈 요나보다도그리고 이 이방인들이 지혜를 얻으려고 땅끝에서 찾아온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가 바로 당신이심을 선언하십니다십자가가 소리 높이는 선언입니다성부의 뜻에 따라 세상 구원을 위해서 짊어지시고 죽음을 맞이하신 십자가는성부께 대한 전적인 믿음의 표지이며모든 이의 회개와유다인이건 그리스인이건곧 믿는 이건 믿지 않는 이건 이들을 하나로 묶는 표지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나 하느님 보시기에는 지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십자성호를 그으며 신앙인으로서의 자긍심과 함께 회개하는 삶다시 말해서 선과 악을 분명히 식별할 줄 아는 슬기로운 삶을 다짐하며힘찬 발걸음을 이어나가는구원의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1,29-32: 요나의 표징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29절) 선언하신다. 여기서 ‘악하다’는 말은 단순히 도덕적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고집에 사로잡힌 영적 완고함을 의미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기적을 보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이다. 기적은 회개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다.”(Homilies on Matthew 43) 따라서 외적인 표징만을 갈망하는 태도는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교부들은 한결같이 요나의 체험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예표로 읽었다. 성 예로니모는 “요나가 바다의 심연에서 사흘 만에 살아 나온 것은,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Commentary on Matthew 12,40) 해석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 요나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미리 드러내는 그림자”(De Civitate Dei, 18권 30장)라고 설명한다. 요나가 니네베인들에게 회개를 선포했을 때, 이방인들이었던 그들은 말씀을 듣고 변화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들 가운데 계신 “요나보다 더 큰 이”(32절)를 거부했다. 여기서 드러나는 역설은, 종종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장 멀리 서게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비유로 남방 여왕(셰바의 여왕)을 언급하신다. 그녀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와서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자 했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 장면을 두고 “열린 마음을 가진 이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지혜를 찾지만, 닫힌 마음을 가진 이는 곁에 계신 지혜를 보지 못한다.”(Moralia in Job 28,3,7; Homilies on the Gospels 11)고 말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여왕을 하느님의 말씀을 찾고자 하는 모든 이방인의 모형으로 보아왔다. 이와 달리, 유다인들은 성전과 율법을 지니고 있었지만, “솔로몬보다 더 큰 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교리서 638-655항에서는 부활을 “우리 믿음의 중심 진리”, 곧 하느님의 결정적 표징으로 선포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원 역사에서 최고의 진리이자 결정적 표징이다. 십자가 죽음은 부활 없이는 무의미하고, 부활은 죽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651 참조) 결국 신앙생활은 기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 안에서 내 삶이 변화되는지에 달려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가장 큰 기적은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Sermon 270,2)이다. 내가 변화되지 않으면 어떤 외적 기적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내가 회개하고 내 눈이 새롭게 열릴 때,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 은총의 표징으로 드러날 것이다. 날마다 회개와 변화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아멘! 


전삼용 신부님_신앙인의 관계 손절 대상 1순위 

 

 

얼마 전에 제가 성당 앞길에 서 있는데, 성당도 안 다니시는 어떤 분이 대뜸 성당은 왜 노숙인들을

위해 무료 급식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곧 예비자 교리가 시작한다는 저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무료 급식은 하나의 표징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이 표징을 요구한다면 그 사람과는 더는 대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악한 세대를 나무라십니다.

그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믿지 않는 하나의 핑계일 뿐이었습니다.

표징을 받을 자격이 된 이들은 먼저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러 온 남방여왕이나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이 그들을 단죄할 것이라 하십니다.  

 

세상엔 정말 많은 믿을만한 표징이 있습니다. 세계 도처 어디를 가나 썩지 않는 성인들이나

성체 기적들이 널렸습니다.

예를 들면 루르드의 베르나데트 성녀는 몸이 썩지 않고 내장도 그대로 있습니다.

란치아노의 성체성혈 기적은 UN에서까지 조사를 해서 기적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래도 안 믿습니다.

믿기 싫으니까요.  

 

이런 예는 수없이 많고, 심지어 신자들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제가 어떤 자매의 병자성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남편의 외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암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죽기 직전까지 남편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며 의아해했습니다.

만약 남편의 외도가 행복해 보이지 않고 불쌍해 보였다면?  

 

어떤 자매는 남편이 외도하는데, 매일 한 시간씩 성체조배를 1년 동안 했더니 남편이 불쌍해

보이더랍니다.

‘그게 뭐라고 자녀들과 아내, 회사 사람들에게까지 욕을 먹어가면서 그렇게 죄를

지을까?’ 하고요.

남편의 영혼 구원을 위해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정상 아닐까요?  

 

죄가 행복으로 보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느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도 표징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줄었을 때 저는 조금 더 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분명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나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강론할 때 아이들이 귀에 안 들어오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아이들의 행복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우선 죄가 고통임을 알려줄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저는 ‘하.사.시.’가 그런 예언자였습니다.

돈 많이 벌고 성공해서 예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저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이었음을 깨닫게 해 준 책이 하.사.시.입니다.

먼저 이 설교를 듣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든 다윗 임금은 자신의 죄를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나탄 예언자가 찾아와 부자의 탐욕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자, 다윗은 크게 분노하며 “주님을 두고 살아 있는 한, 그런 짓을 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라고 외칩니다.

바로 그 순간, 나탄은 다윗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선언합니다.

“그자가 바로 임금님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까맣게 잊은 채, 다른 사람의 죄(그것도 비유 속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불같이

의로운 심판관 행세를 했습니다.

자신의 거대한 죄를 ‘필요에 의한 선택’ 혹은 ‘왕의 권리’로 여겼기에 가능했던 위선이었습니다. 

 

설교는 이 위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 표징도 받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우구스티노 성인입니다.

젊은 시절 아우구스티노는 마니교에 빠지고, 쾌락을 추구하며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공허하고 죄로 가득 차 있음을 지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오랜 습관의 사슬을 끊어낼 의지력이 없었습니다.

“내일은 꼭 끊어야지”라고 다짐하면서도 그 ‘내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주교를 만납니다. 그는 처음에는 주교의 뛰어난 웅변술에 끌렸지만,

점차 그의 설교를 통해 가톨릭 신앙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결단하지 못하고 정원에서 괴로워하던 어느 날, 어디선가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하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이를 하느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구절은 로마서 13장 13-14절,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그만두십시오.” 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마음을 꿰뚫는 빛이 되었고, 그는 마침내 오랜 죄의 삶을 청산하고 회개합니다. 

 

자신의 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말씀을 먼저 접하려고 하지 않는 자가 표징을 요구할 때 그냥 무시하면 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는 자가 찾는 표징은 믿지 않는 핑계일 뿐입니다.

거기에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도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느님의 가르침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찾았습니다.

절대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어른을 공경해서 모르는 어른에게도 인사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지금 여쭤보니 어머니는 그런 말씀을 하신 줄도 모릅니다.  

 

저는 그래서 성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특별히 ‘하.사.시.’의 말씀에 무관심한 이들은 일단 마음적으로 가까이하려 하지 않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이 전혀 없는 이들이라 나의 말도 먹히지 않고, 나의 사랑도 온전한 표징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을 정할 때 우선 그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의 말이나 하느님 말씀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이는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며 표징만 보여달라는 이들은 우선은 멀리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런 이들을 ‘악하다’라고 했는데, 우리가 기꺼이 가까이 가면서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양승국 신부님_회개는 매일 매 순간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일상적인 과제입니다! 

 

 

신앙 안에서 참으로 경계해야 할 적들이 있습니다.

쇄신과 거듭남을 위한 시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타성에 빠진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한 노력은 조금도 없이 ‘내가 올해로 신앙 생활한지 30년이네, 40년이네’ 하는 자만심입니다. 

 

늘 치열하게 자신을 담금질하려는 노력은 뒷전인 채 쓸데없이 지니고 사는 우월의식입니다.

신앙의 핵심에는 조금도 접근 못 한 채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외형에만 잔뜩 신경 쓰는 위선적 신앙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예수님 가시는 곳 마다 수많은 군중이 운집하곤 했었는데, 그중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과 표징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현장에서 목격해놓고서는, 그래도 모자랐던지,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참으로 기가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한 이래 그동안 보여준 표징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침식까지 잊어가며 그들을 위한 사랑의 손길을 펼치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앞이 안보이는 이들에게 시력을 되찾아주셨습니다.

청력이 손상된 사람들의 귀를 열어주셨습니다.

심각한 언어 장애를 안고 있는 이들의 말문을 트이게 하셨습니다. 

 

온몸이 나병으로 문드러진 말기 환자의 피부를 말끔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꼼짝못하고 누워만 지내던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이미 목숨이 떨어진 회당장의 딸을 되살려주셨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의 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의 거센 풍랑을 말씀 한 마디로 잠잠하게 만드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치유의 능력과 악령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전무후무한 명설교, 생생하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당신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아임을 명명백백히 밝히셨습니다. 

 

더 이상 무슨 표징이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사실 군중이 요청한 표징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표징이었습니다.

결코 요구해서는 안 될 자신들의 개인적인 욕구, 얼토당토않은 허황된 바램, 끝도 없는 이기적인 욕심들을 충족시켜달라는 요구였습니다. 

 

끝도 없이 엉뚱한 요구를 해대던 군중은 하느님의 뜻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뜻을 따르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그들의 요구 앞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실 리가 없습니다. 

 

마음이 완고해질 대로 완고해진 군중, 끝까지 돌아서지 않는 군중의 행태에 너무나 가슴이 아프셨던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와 남방 여왕의 예를 들며 거의 독설에 가까운 말씀을 그들의 가슴이 던지십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복음 11장 31절) 

 

참으로 불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자신들은 스스로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민족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하느님으로 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개만도 못한 종족이라던 이방인들이 줄줄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갔지만 하느님의 장자격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나라 법정의 피고인석에 다들 앉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지속적 회개’였습니다. 

 

회개는 평생 한번, 아니면 일생에 한번 하고 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매일 매 순간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일상적인 과제가 회개인 것입니다. 

 

다행이도 아직 우리 모두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아직 우리가 숨 쉬고 있다는 것, 이 세상에 두발로 서 있다는 것은 회개가 가능하다는 표시고

하느님 자비와 용서, 새 생명과 구원이 가능하다는 표시입니다. 


한상우 신부님_"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우리는

언제나 표징을

찾지만,

하느님께서는

회개를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일상 속에서

다시 깨어나는

하느님 현존이

가장 살아있는

우리 믿음의

표징입니다. 

 

사람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징은

외적인

기적이 아니라,

내적인 회심의

뚜렷한

표징입니다. 

 

참된 신앙은

보이지 않아도

신뢰하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표징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회심한

우리의 마음이

곧 하늘의

표징입니다. 

 

이 표징은

하느님의 구원이

우리의 약함과

회개를 통하여

드러난다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부활은

고통을 통과한

사랑의 참된

표징입니다. 

 

요나의 표징은

하느님의 계시가

우리의 역사 안에서

육화되고

완성된 사건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적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방향이

바뀌는 일입니다. 

 

마음의 변화 없는

기적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회개가 표징을

완성하듯

회개 자체가

곧 예수님께서

바라시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이 시간이

기적만을 바라는

요행이 아니라

회개한

우리 마음 안에

가득 깃든

사랑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마음의 날입니다. 


조명연 신부님_우리는 자기의 단점을 숨기기에 급급합니다. 그리고 이 단점을 남에게 절대 보여줘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단점이 진짜 단점일까요? 단순히 사람들과의 다른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 단점이라면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눈이 처졌습니다. 저의 형제 모두가 처진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유전적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어렸을 때 친구들로부터 놀림의 이유가 되면서, 처진 눈을 가리기 위해 두꺼운 안경테를 쓰기고 하고, 일부러 눈을 부릅떠서 쌍꺼풀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눈이 가려졌을까요? 처진 눈이 과연 지금은 올라갔을까요? 그냥 힘만 쓴 것이었습니다. 

 

인도의 18세 소년인 라리프는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얼굴 털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체 곳곳에 털이 자라는 희귀병인 과 다모증을 앓고 있습니다. 처음 만나 사람들은 그의 엄청나게 많은 털을 무서워하고, 사람들로부터 털을 제거하라는 조언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외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면서 깎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자기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단점이라 할지언정 이를 숨길수록 상대에게 솔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는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떄문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정체성에 대한 표징을 요구하는 군중을 향해 ‘악한 세대’라고 지적하면서, 진정한 표징은 ‘요나 예언자의 표징’뿐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믿음을 두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숨기려고만 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죄를 모두 숨기고 있을 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위선자’라면서 심하게 꾸짖으셨지요. 자기 죄를 숨기면서 짐짓 겉으로면 경건한 척했던 위선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군중도 죄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겁도 났을 것입니다. 이분이 정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면 자기의 모든 죄가 드러나지 않을까? 그래서 예수님의 권능과 정체성을 환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표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이에 따라 촉발된 회개의 메시지를 예표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밤이 어두운 장막 뒤에는 미소 짓고 있는 새벽이 있다(칼릴 지브란).


이병우 신부님_"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17,29) 

 

'회개의 순교!' 

 

오늘 복음(루카17,29-32)의 제목은 '요나의 표징'입니다. 요나의 표징은 '회개의 표징'입니다.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17,29-30) 

 

요나의 표징은 '회개의 표징'입니다. 주님께서 파견하신 요나 예언자의 설교를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다시 살아난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되신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표지'입니다. 

 

어제 '천호성지'로 본당 성지순례를 잘 다녀왔습니다.

천호성지는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하신 분들이 모셔져 있는 곳입니다. 103위 순교 성인 중에서는 성 정문호바르톨로메오(96위), 성 손선지베드로(97위), 성 이명서베드로(98위), 성 한재권요셉(99위)이 묻혀 계십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회개'입니다.

성지순례는 단순한 관광이나 여행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여행'입니다. 현세적 안락과 안녕을 포기하고 오로지 주님만을 따라나선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성지순례의 목적'입니다. 

 

'회개'는 주님이신 예수님 설교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로 돌아갑시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주님께로 돌아갑시다! 

 

'회개가 곧 순교'입니다! 

 

'Happy birthday to me! 

 

(~ 2사무17,2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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