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게시판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녹) 2025년 11월 16일 (일)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가톨릭마당

sub_menu

10월 23일 수원교구청 묵상

185776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10-23

김건태 신부님_참 평화

 

 

비신자들이 우리에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시러 오셨는지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러 오셨는지를 묻는다면우리는 망설임 없이 그분은 평화를 가져다주시고 서로 사랑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갈라진 형제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오셨다고 대답할 것입니다우리는 또한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바로 이를 위해서였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복음서의 여러 본문을 인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읽는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평화가 아니라 분열아들이 아버지와딸이 어머니와집안 식구가 서로서로 갈라서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예고입니다분열을 조장하시는 예수님하나 됨이 아니라 갈라서게 하시는 예수님어느 누가 이런 예수님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어느 누가 예수님의 입에서 이런 말씀이 흘러나오리라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분열이 아니라 평화를 주러 오신 분임을 굳게 믿고 있는 우리로서는 오늘 말씀의 자구가 아니라 그 의도에 집중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예수님의 진정한 뜻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데 있지 않음을 직시해야 합니다물론예수님은 당신의 말씀과 행적으로 말미암아 분열이 일어날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분명 예수님은 말씀과 행적으로 평화를 주러 오셨으나그 평화의 말씀과 행적이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분열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자리하게 될 것임을 잘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예수님 당대나 마태오 복음저자 시대나 지금이나어떤 이들에게 예수님은 평화의 장인으로 인식되는가 하면어떤 이들에게는 분열을 조장하시는 분으로 받아들여집니다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세상 어디에서나 오해와 단절과 다툼의 대상이 되기 일쑤이며많은 경우 한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임을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정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의 이 가르침을 주시는 의도는그러한 오해와 편견과 속단에 굴하지 말고주어진 사명 곧 복음전파 사명에 충실하라는 데 있음을 새겨 보아야 합니다이것이 바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모습임을 강조하고자 하십니다스승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러한 오해와 편견 속에서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셨기 때문입니다어찌 보면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삶을 사신 분입니다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하고 소리 높이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파견될 제자들이 마음 한편에 새기고 살아야 할 소중한 가르침을 전해주십니다세상의 오해와 편견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그것을 오히려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주님 말씀 전파에 몸과 마음을 다할 것을 독려하십니다.

 

 

오늘 하루비록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 행위를 분열을 조장하는 일로 치부한다고 하더라도그 행위를 통해 비로소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자리하게 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으로신앙 전달에 최선을 다하는소중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2,49-53: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49절)라고 말씀하신다. 불은 우리 삶에서 파괴적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정화하고 새로운 생명을 일으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은 바로 성령의 불, 복음의 불, 사랑의 불이다. 엠마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않았던가?”(루카 24,32) 고백했다. 이 뜨거움이 바로 복음의 불이다. 이 불은 우리의 삶 속에서 죄와 악습을 태워 없애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열정을 일으키며, 세상을 새롭게 하는 에너지로 작용한다. 

 

예수님은 또한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50절) 하신다. 이는 곧 십자가의 죽음과 순교의 세례를 뜻한다. 예수님은 이 고통과 죽음을 통해 세상에 불을 지피셨고, 그 불은 사도들의 마음을 태워 교회를 세상 끝까지 확장하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51절)라고 하신다. 이는 곧 참된 신앙이 인간 내면과 가정, 사회 안에서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말한다. 하느님을 섬길 것인가, 세속을 좇을 것인가 하는 선택에서 갈등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 갈등은 참된 사랑과 신앙을 드러내기 위한 정화의 과정이다. 

 

성 치프리아노는 신앙 안에서의 갈등과 선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 충실하려면 세상과의 평화가 깨어져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는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참된 평화, 곧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다.”(Epistula 55, Ad Cornelium) 성 바실리오 또한 불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 불은 단순한 물질의 불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을 정화하고, 사람의 마음속에 신적 사랑을 불타오르게 하는 불이다.”(Homilia in Psalmum 28) 교리서도 같은 맥락을 가르친다. “성령께서 오실 때, 그분은 우리 마음을 불타오르게 하시어 죄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열정을 일으키신다.”(696항) 

 

성령의 불은 미지근한 신앙을 깨우고, 나태한 삶을 태워버리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열정으로 우리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 불은 우리 삶에 불편함과 갈등을 가져올 수도 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족 안에서, 직장에서, 세상 속에서 맞닥뜨리는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 갈등은 우리를 정화하고, 더 순수한 신앙으로 이끄는 하느님의 섭리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불을 청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을 태워 없애고, 내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활활 타오르도록, 또한 세상 속에서 복음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주님께서 세상에 지르신 불은 단순히 파괴의 불이 아니라, 정화와 사랑, 성령의 불이다. 그 불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세상 속에 참된 평화를 세우는 불이다. 우리 모두 주님의 불을 받아, 내 안과 가정, 그리고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밝히는 불씨가 되기를 기도하자. 아멘. 


전삼용 신부님_독해지면 뜨거워진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섬뜩할 만큼 강렬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예수님은 세상을 당신 사랑으로, 성령의 힘으로 완전히 불태워 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장작에 불이 붙으려면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장작이 말라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불쏘시개가 있고 거대한 불씨가 있어도, 장작이 축축하게 젖어있으면 연기만 피어오를 뿐 결코 활활 타오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르러 오신 성령의 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불이 내 안에서 타오르게 하려면, 나 자신이 먼저 '마른 장작'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가득한 세상의 물기, 육체의 물기를 빼내는 작업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영과 육은 서로 반대되어, 육이 살고자 하면 영이 죽고, 육이 죽어야 영이 살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을 말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단식과 같은 극기입니다.

나를 '독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1학년 때, 사순 시기를 맞아 큰맘 먹고 일주일 단식을 결심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굶으셨는데, 일주일쯤이야 못하겠나 하는 젊은 혈기였지요.

하지만 배고픔은 생각보다 지독했습니다.

결국 이틀 만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한심해서 성당 바닥에 엎드려 있는데, 바로 그때 제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분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나는 네게 내 전부를 주었다.” 

 

고작 이틀 굶은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주님께서 만나주셨을까요?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기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저의 가장 강력한 본능인 식욕을 '독하게' 끊어내며 제 자신을 말리려 했던 그 작은 노력, 그 틈새를 주님께서는 놓치지 않으셨던 겁니다.

젖어 있던 제 영혼에 잠시나마 물기가 마르는 그 순간, 성령의 불씨가 제 마음에 ‘착’ 하고 내려앉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토록 독해져야 하는 이유는, 성령께서 그냥 좋은 기운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저절로 사라지듯, 그분의 거룩한 생명이 들어오시려면 내가 주인 행세하던 나의 옛 생명이 죽어야만 합니다.

내가 시퍼렇게 살아 날뛰는 한, 성령의 불은 결코 붙을 수 없습니다. 

 

이 원리는 세상의 성공에서도 똑같이 발견됩니다. 가수 비, 정지훈 씨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독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배고픈 게 제일 무서워요.

그래서 독해졌어요." 

 

그를 독하게 만든 것은 바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피'였습니다.

지독한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시던 그의 어머니는, 온몸이 퉁퉁 붓고 심지어 목에 인슐린 주사 바늘을 아홉 개나 꽂은 채로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하셨습니다.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보며 피눈물을 삼켰고, "반드시 성공해서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가난은 모질었고, 아들이 성공하기 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살던 집마저 불타버렸습니다.

그 잿더미 위에서, 그는 어머니의 희생과 피를 가슴에 새기며 다짐했습니다.

"어머니가 못다 한 삶까지, 두 배로 열심히 살겠다." 그 어머니의 피, 그 희생이 아들의 심장에 불을 질렀고, 그는 정말 독하게 춤추고 노래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이라는 '피'가, 아들을 '독하게' 만들었고, 그 독함이 마른 장작이 되어 성공의 불을 붙인 것입니다. 

 

성인들의 삶은 바로 이 영적인 독함의 결정체입니다.

위대한 학자이자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예로니모 성인을 보십시오.

그는 젊은 시절 로마에서 화려한 생활을 즐겼지만, 마음속에서는 늘 하느님을 향한 불타는 갈망과 육적인 욕망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수난 때문에, 이 내면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독한 결심을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시리아의 사막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훗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벗은 오직 전갈과 들짐승뿐이었다.

나는 날마다 눈물 흘리고 한숨지었으며, 주님께서 내게 평화를 돌려주실 때까지 바위 위에 내 몸을 던졌다." 그는 타는 듯한 태양 아래서 돌로 자신의 가슴을 치며, 육신의 욕망이라는 물기를 완전히 말려버리기 위해 자신을 학대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지독하게 죽이고 또 죽였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그의 영혼에 성경 번역이라는 거룩한 불을 붙여주셨고, 그 불은 '불가타 성경'이 되어 천 년이 넘게 서방 교회를 밝히는 빛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성령 강림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뒤, 두려움 속에서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모아 꾸준히' 기도했습니다.

잡히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 그들은 세상으로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독하게 기도하며 자신들을 말렸습니다.

목숨을 내어놓는 그 독한 결단 위에, 마침내 성령의 불길이 혀처럼 갈라지며 내려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령의 불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우리 육신을 죽이는 독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로마 8,13) 

 

성령의 불은 편안하고 안락한 삶, 적당히 타협하는 미지근한 삶에는 결코 붙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즐기는 것, 나의 게으름과 안일함을 십자가에 못 박는 독한 결단이 있을 때,

바로 그 마른 자리에 성령의 불이 임하십니다. 오늘, 내 안에서 말려 없애야 할 물기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을 끊어낼 독한 마음을 허락해 주시도록 주님께 청합시다. 


이병우 신부님_"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12,49.51) 

 

'생명과 부활, 그리고 참평화를 위하여!'  

 

오늘 복음(루카12,49-53)은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참평화'가 배제된 가운데에서 오늘 복음을 대하면, 참으로 이해할 수 놀라운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더 심하면 "이런 하느님이셨어!, 이런 예수님이셨어!" 하면서 신앙을 저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여!" 

 

우리가 매일 미사를 드릴 때마다 이렇게 외치는 것처럼, '신앙은 신비'입니다. '신앙은 역설(paradox)'입니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처럼 죽어야 살 수 있고 부활할 수 있다는 '신비요 역설'입니다.  

 

신앙의 신비요 역설 안에서 오늘 복음을 바라봅시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정화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와 악령을 씻어내는 정화의 의미', '이 정화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성령과 악령의 싸움, 호시탐탐 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악령과의 싸움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죄의 종이 되지 않고, 하느님의 종이 되려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불과 분열 그 너머에, 믿는 이들이 얻고자 하는 본질인, 생명과 부활과 참평화가 있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이며,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로 오늘 복음을 묵상해 봅니다.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죄(죄의 종)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하느님의 종)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로마6,23) 

 

(~1열왕9,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3 51 0

추천  3 반대  0 신고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