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0월 28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
185889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10-28
-
김건태 신부님_시몬과 유다(타대오) 사도
오늘 우리는 열두 사도 가운데 두 분, 성 시몬과 유다 사도를 기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두 사도에 관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시몬을 ‘열혈당원’으로 소개하는 정도입니다(마태 10,4; 마르 3,18; 루카 6,15; 사도 1,13). 열혈당원은 로마 제국과 그 동조자들에게 무력으로라도 대항해서 유다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믿고 행동하던 정치 집단이었습니다.
유다는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의 사도 명단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명시되고 있으나(루카 6,16),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는 유다 대신 타대오가 언급됩니다(마르 3,18; 마태 10,3). 이는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에, 한 사람이 유다식 이름과 그리스식 이름을 동시에 갖는 일이 흔했습니다. 따라서 유다(Judas)의 그리스식 이름이 타대우스(Thaddaeus)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유다는 자연스럽게 ‘유다 타대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서방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시몬은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유다 타대오와 함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활동했고, 두 분 모두 페르시아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에서 이교도의 사제와 예언자들과 논쟁하다가 그들의 신상을 무너뜨려 처형되었는데, 시몬은 십자가형이나 톱으로 몸이 잘려 순교했고, 유다 타대오는 창에 찔리거나 도끼로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전승에 따라 8세기 이후 10월 28일 같은 날에 이 두 사도를 기념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밤을 새워 기도하신 다음,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 가운데 열둘을 뽑아 사도라 부르십니다. 루카 복음이 특별히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 하나는 중대한 사건이나 결정 앞에서 늘 기도로 시작하시는 모습입니다. 요르단강 세례, 베드로의 신앙고백, 거룩한 변모, 주님의 기도, 겟세마니 동산, 십자가상 죽음의 시간 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먼저 밤을 새워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만큼 사도 선택이 중대한 사건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늘 곁에 두시어, 그들이 당신의 말씀을 직접 두 귀로 듣게 하고, 당신의 행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하십니다. 바로 이들이 당신의 뒤를 이어 귀와 눈으로 직접 듣고 본 것을 전하며, 지상 교회를 맡아 구원사업을 이어나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 양성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며, 예수님의 최대 역점 사업이 제자 양성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뽑아 세우신 사도들은 출신과 성격과 직업이 매우 다양한, 얼핏 보기에 우리와 별반 큰 차이가 없는 매우 평범한 사람들로 보입니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을 당신 교회의 큰 기둥으로 키워내셨다는 사실 앞에서, 스승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확신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펼치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이 바로 제자 양성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오늘 특별히 기념하는 두 사도, 시몬과 유다를 포함한 당신의 모든 사도를 위해 그러하셨던 것처럼, 부족한 우리를 하느님 나라 건설에 꼭 필요한 일꾼으로 만들어 나가시리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힘껏 봉사하는, 보람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6,12-19: 제자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1. 두 사도의 기억
오늘 교회는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를 기린다. 시몬은 “열성 당원”(Ζηλωτής)이라 불리며, 유다 율법에 철저하고 민족적 열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유다는 타대오라고도 불리며,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하고 질문한 사도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기질과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이 주님의 사도로 함께 불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 됨을 이루시는 분임을 드러낸다.
2. 예수님의 선택과 제자 공동체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신 후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다고 전한다. 이 선택은 단순한 행정적 결정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대화 속에서 이루어진 거룩한 행위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시기 전에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것은, 제자들이 인간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선택되었음을 보여준다.”(In Matthaeum Homiliae, PG 57, 269)
사도들은 특별히 뛰어난 자격이나 학문적 준비로 뽑힌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강조합니다: “주님은 완전한 이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이들을 부르시어 완전하게 만드셨다.”(Sermo 340, 1) 따라서 제자의 사명은 인간의 능력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의존한다.
3. 사도의 본분: 배우고, 따르고, 닮는 것
‘제자’(disciplus)란 곧 배우는 사람을 뜻한다. 사도들은 먼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배우는 사람들이었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며 점차 스승을 닮아갔다. 공의회 문헌 사목 헌장은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가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자라나도록 협력한다.”(사목 38) 결국 사도 됨은 단순한 직책이 아니라, 스승과 함께 살아가며 “그분처럼 되는 것”(1요한 3,2)을 목표로 하는 삶이다.
4. 오늘 우리에게 주는 초대
열두 사도는 흠 없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부르심에 응답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변화될 수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믿음을 키우며, 그분을 닮아 살아가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도가 된다는 것은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다. 그분을 닮으려는 이에게서만 진정한 선포가 흘러나온다.”(Enarrationes in Psalmos, 44,23)
5. 결론과 기도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의 모범은, 서로 다른 배경과 성격에도 불구하고 한 분 주님 안에서 하나 되어 복음을 전한 제자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도직 교령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사도직에 참여한다. 이는 교회의 생명과 세상 속에서 복음을 증언하는 데서 드러난다.”(Apostolicam Actuositatem, 3)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선택된 자들’로서 제자의 길을 살아가야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답하여, 말씀을 배우고, 사랑으로 살아가며, 세상 속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 미사 안에서, 우리 각자가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처럼 닮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은총을 청해야겠다.
전삼용 신부님_소명과 사명의 차이: 모든 이들은 기도의 소명으로 불리운다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 타대오 사도 축일입니다.
시몬은 열혈당원으로 불렸고 유다는 그리스도의
형제로 여겨집니다.
열혈당원은 당시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무장세력이었습니다.
『하.사.시.』에 의하면 시몬은 독립운동을 하다 나병에 걸렸고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은 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며, 유다는 야고보와 함께 알페오의 아들들로 불리며 예수님의 사촌 형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으신 다음 그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으시고 당신이 복음을 전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십니다.
나중에 파견도 하시지만, 오늘 복음만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다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룩한 부르심’, 곧 ‘소명’(召命)에 대한 참다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명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도록 맡겨주신 일일까요? 아닙니다.
소명의 뜻은 “생명을 요구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냥 나의 존재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무언가 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는 ‘사명’(使命)이라고 합니다.
만약 소명과 사명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큰일이 벌어집니다.
가리옷 유다 같은 사도가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소명의 의미를 사명과 헛갈린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주님께 무언가 해 드리려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아마 세속적인 것에 밝아서 예수님께서 돈주머니를 맡기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그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점점 자기식으로 주님을 섬기려 했고 결국엔 주님을 팔아넘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명에 집중하는 사람은 ‘업적 주의자’가 되어 눈에 보이는 일을 해내지 않으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처럼 여깁니다.
“선생님 제가 물 위를 걸어 갠지스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수행자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라마크리슈나’를 찾아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높아진 도력을 자찬했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있던 라마크리슈나가 물었습니다.
“그래, 몇 년이나 수련했는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18년 만에 이루어냈습니다.”
스승은 다시 물었습니다.
“이보게, 갠지스강을 건너는 데 뱃삯이 얼마인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18루피라고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라마크리슈나가 수행자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이나 수행해서 겨우 18루피를 벌었네.”
이것이 소명이 아닌 사명에만 집중하는 제자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명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를 증명하며 삽니다.
그리고 증명되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어떤 목사님이 10년 동안 죽도록 고생하여 사목하였는데도 신도가 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절망에 빠져 십자가 앞에 엎드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는 실패한 목사입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실패한 것이다.”
그 목사님은 “제가 실패한 건데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실패한 것이다.
만약 많은 신도가 생겼다면 이는 네가 성공한 것이냐, 내가 성공한 것이냐?”라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에만 집중하여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 소명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가다 보면 자칫 가리옷 유다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명과 사명을 구분해야 합니다.
소명은 생명을 요구하신다는 것이고 사명은 일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결혼할 때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의 능력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본인도 어떤 능력으로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이혼의 빌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소 아내와 호랑이 남편이 결혼하였습니다.
소 아내는 호랑이 남편에게 맛있는 샐러드를 대접했고 호랑이 남편은 맛있는 살코기만을 잡아 왔습니다.
결국, 둘은 최선을 다했지만, 상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일 시키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일은 당신이 다 하십니다.
그것보다 우선 주님은 당신과 함께해줄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불러주실 때 저는 “제가 아이 낳아서 주님께 두 명 이상 봉헌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나는 너를 원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무언가 해 드리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저’를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또 신학교 들어와서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정말 감사해서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생명까지도 다 드리겠습니다. 당신께 무엇을 해 드리면 좋을까요?”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다.
나에게 붙어 있어라!”
우리는 자꾸 나를 불러주신 분을 위해 무언가 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것 자체가 그분께는 모욕이 됩니다.
나 없으면 무언가 부족한 분으로 내가 취급해드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내가 없어도 잘만 지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내 능력으로 무언가 해 드리는 일이 아닌 그저 당신 덕분에 행복해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주님께서 나를 써주셔서 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소명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그분 부르심의 응답입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분께 나 자신을 봉헌하여 붙어 있을 줄 아는 것이 소명에 응답한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렇게 소명을 기도로 응답하면 사명은 그때그때 내려주십니다.
저는 유튜브를 시작한 것을 매우 만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강의하는 것에 지쳐 있었고 또 저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서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때 주님은 코로나를 주셨고 코로나 동안 갑자기 시간이 생겨서 기도하던 중 주님께서 유튜브를
하라는 강한 느낌을 주셨습니다.
저는 처음에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전문가들에게 물어보았고 그들은 팀을 꾸려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저는 채널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여 찍고 편집하는 방법 등을 유튜브 보고 스스로 배워 부족하지만
조금씩 올렸습니다.
일 년 반이 지난 지금 많은 분이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공감해주십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도 어려워하던 것들을 평신도분들이 이해하고 삶을 그렇게
변화시키려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내 힘으로 무엇을 하는 것보다는 주님의 뜻에 맡겨 사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께 주의만 기울이고 있다면 사명은 주님께서 그때그때 알려주십니다.
내가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명은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은 소명입니다.
소명이 있으면 사명은 필요할 때 저절로 주어집니다.
그러니 지금 삶의 목적이나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찾지 마십시오.
우선 내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먼저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이 아닌 당신을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뽑으시고 당신이 내려가셔서 선교하십니다.
제자들을 뽑으시고 일을 시키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보다는 소명에 집중합시다.
주님은 나를 원하고 계실 뿐입니다.
이병우 신부님_<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10.2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루카6,13)
'기도하신 예수님과 또 하나의 사도들인 우리들!'
오늘 복음(루카6,12-19)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그것도 산으로 나가셔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셔서, 그들을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루카6,14-16)
오늘은 열두 사도 중에서 열정의 모습을 지닌 열혈당원 시몬과 타대오라고도 불리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당신께서 하셔야 할 중요한 일에 앞서 먼저 기도하신 예수님, 그것도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그렇게 뽑힌 사도들의 모습을 묵상해 봅니다.
그리고 성찰해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대리자들인 사제들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닮고 있는지?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들은 얼마나 하느님께로부터 뽑힌 자랑스러운 존재라는 자긍심과 자존감을 지니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2,19-20)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당당하게 그리고 기쁘게 말과 행동으로 너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또 하나의 사도들'이 됩시다!
(~ 1열왕14,3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
- 연중 제 30 주간 수요일
-
185892
조재형
2025-10-28
-
반대 0신고 0
-
-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
185891
박영희
2025-10-28
-
반대 0신고 0
-
- 2025년 10월 28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
185889
최원석
2025-10-28
-
반대 0신고 0
-
- 이영근 신부님_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
185888
최원석
2025-10-28
-
반대 0신고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