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25일 수원 교구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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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39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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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내려오심’의 최종 목적지는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1-5).”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9-14).”
1) 요한복음의 머리글은,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인데, 내용을 보면,
사람들의 거부와 배척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여러분을 구원하려고 오셨는데도
여러분은 왜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는가?” 라고
꾸짖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믿음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만 보지만, 믿는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그분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탄생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방을 내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양간에서 태어나신 일도
그렇고, 헤로데를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한 일도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의 성탄은 ‘십자가의 길’의 시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탄절을 경축하고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의 수난도 묵상하면서, 차분하고 경건하게
성탄절을 지내야 합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일의 최종 목적지는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6-11).”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니,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지는 예수님처럼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이 말씀은, 열두 사도에게 보상을 약속하신 말씀인데,
열두 사도만 그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받게 됩니다(묵시 21,7).
3) 예수님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은
우리를 하늘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만일에 ‘내려오심’만 생각하고 ‘다시 올라가심’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또 우리의 ‘올라감’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존경하는 일은 될 수 있어도,
신앙하는 일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1-4).”
신앙인은 ‘땅에 있는 것’은 버리고
‘위에 있는 것’만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4) 예수님의 구원 사업은,
‘한처음’에 시작해서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지극히 짧은 ‘중간 과정’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구유’도 아주 잠깐 머물렀던
임시 거처였을 뿐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 탄생 뒤에, 외양간을 떠날 때
‘구유’를 그곳에 그대로 두고 떠났습니다.
만일에 “메시아께서 누워 계셨던 구유이니까 대단히 중요한
물건이다.” 라고 생각해서, 구유를 잘 챙겨서 가지고 갔다면,
그것은 참으로 이상하고 우스운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이 ‘신앙의 지혜’입니다.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인이라면
‘허무한 것’은 아까워하지 말고 모두 버려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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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이병우 신부님_"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1,9)
우리도 성탄이 되자!
'주님성탄대축일'입니다.
전례력으로 파스카 성삼일, 곧 '주님부활대축일' 다음으로 큰 축일입니다.
주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주님 성탄을 함께 기뻐하며, 주님 성탄의 이 큰 기쁨이 형제자매님들과 그 가정에 충만히 내리고, 너와 온누리에 전해지길 빕니다!
주님성탄대축일 밤미사와 낮미사 때 들려오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9,1.5ㄱ)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2,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1.14)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히브1,2.5)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1,9.14.18)
모두의 구원을 위한 성탄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우리의 이제와 영원한 부활을 위한 성탄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큰 기쁨이며,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오늘은 담벼락도 고기를 먹어야 하는 날입니다."(성 프란치스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충만한 은총에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도 성탄이 됩시다!
삶의 자리에서 너를 살리고 구원하는 또 하나의 성탄이 됩시다!
(~토빗13,18)
전삼용 신부님_나의 양식이 그리스도가 되게
찬미 예수님!
거룩하고 복된 성탄 밤입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를 빕니다.
그러나 오늘 모두가 다 이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밤, 저는 한 가지 질문으로 강론을
시작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먹고 살고 계십니까?"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먹는 것엔 다 그 본래의 주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방송에 깊은 산속 바위 밑에 홀로 사는 한 할아버지의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주식은 사람이 먹는 밥이 아니었습니다.
소에게 주는 사료였습니다.
그는 매끼 사료를 씹어 먹으며 무려 50년을 넘게 살아왔습니다.
제작진이 경악하며 이유를 묻자 그는 말했습니다. "밥 해 먹기 귀찮아서요."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겪은 가정 폭력의 공포가 그를 산속으로 도망치게 했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킨 채, 인간으로서의 존엄인 따뜻한 밥마저 포기하고 짐승의 사료로 연명했던 것입니다.
사료를 먹으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소는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를 산에서 내려오게 한 것은 경찰이나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갓 찐 따뜻한 고구마와 쌀밥을 들고 찾아간 이웃들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이웃의 간곡한 권유에 10년 만에 사료 대신 따뜻한 밥을 입에 넣었습니다.
순간, 그의 얼어붙은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사료의 텁텁함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와 달콤함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맛있네... 사료보다 낫네." 그 밥 한 숟가락이 그를 짐승의 삶에서 사람의 삶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바로 먹는 것을 바꿈으로써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오십니까?
밥으로 오십니다.
오늘 복음은 충격적인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첫아들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루카 2,7) 구유가 무엇입니까?
여물통, 즉 소나 말이 밥을 먹는 밥그릇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짐승의 밥그릇에 당신 몸을 담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간절한 초대입니다.
"너희는 지금까지 세상의 욕망, 돈, 쾌락이라는 '사료'를 먹으며 영혼이 짐승처럼 변해가지 않았느냐.
이제 그 썩어질 사료를 치워라.
그리고 이 구유에 담긴 나를,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밥을 먹어라.
나를 먹고 제발 다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
우리는 엄마를 먼저 만날까요, 엄마가 주는 양식을 먼저 만날까요?
갓난아기가 엄마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믿어서 젖을 먹습니까?
아닙니다. 배고프니까 본능적으로 먹습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그렇게 엄마 젖을 먹다 보면 엄마의 냄새를 알게 되고, 눈을 맞추게 되고, 결국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만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과 성체를 먹다 보면, 내 안에 들어오신 그분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결국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만나게 됩니다.
오늘 목자들은 바로 하늘의 것을 먹고 하늘의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 곧 ‘착한 뜻’을 지닌 이들에게 평화를 선포합니다.
사랑이라는 좋은 양식을 먹고 자라야 내면에도 착한 뜻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사료를 먹으며 좋은 것을 줄 착한 뜻이 생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밥이나 고구마를 먹는데, 다른 사람은 여전히 사료를 먹고 있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먹는 것을 나누고 싶어집니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먹느냐는 내가 무엇을 나누고 싶으냐와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성탄절 밤, 독일 아르덴 숲속의 작은 오두막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독일군을 피해 숨어든 미군 부상병 셋을 주인 아주머니가 숨겨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길 잃은 독일군 넷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총구가 서로를 겨누고, 방 안에는 팽팽한 살기가 감돌았습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증오'와 '살기'라는 사료를 먹으며 서로를 죽이는 괴물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아주머니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오늘 밤은 성탄절입니다.
여기서는 아무도 죽을 수 없습니다.
총을 밖에 두고 들어오세요.
따뜻한 수프가 준비됐습니다."
아주머니의 그 말에, 기적처럼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한 식탁에 둘러앉아 아주머니가 끓여준 수프와 빵을 나누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수프를 나눌 줄 알았습니다.
평화를 나눌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성탄절에 ‘평화’를 만났습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방식입니다.
밥을 나누자 그들은 적군이 아니라 배고프고 추운 '형제'가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먹기로 선택한 것을 내어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독일 군의관은 미군 부상병을 치료해 주었고,
미군은 아껴둔 초콜릿을 꺼내 독일군과 나누었습니다.
그날 밤, 그 오두막은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거룩한 베들레헴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나눈 것은 빵이 아니라 '평화'였고,
그 자리에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사료를 먹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기준은 간단합니다.
'오늘 이것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것은?' 물어보십시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에게 매일 1시간의 성체조배를 의무화했습니다.
일거리가 쏟아지는 빈민가에서, 봉사자들은 "수녀님, 환자들이 죽어갑니다.
기도할 시간을 줄이고 일을 더 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마더 데레사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일이 많을수록 기도는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먹지 않으면(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빈 깡통으로는 아무도 먹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매일의 양식은 '먹으면 좋고 안 먹어도 그만인' 간식이 아닙니다.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 것이 양식입니다.
우리에게 말씀과 성체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말씀 묵상을 하지 않고는, 성체 조배를 하지 않고는 내 영혼이 숨을 쉴 수 없다."
이런 절박함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짐승의 밥그릇에 오신 주님을 찬미하며, 여러분 모두가 하늘의 밥심으로 살아가는 참된 하느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빕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12월25일 [성탄 대축일 낮 미사]
복음: 요한 1,1-18: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어젯밤 미사의 전례가 하느님 아들의 탄생 신비를 맞이하는 흥분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오늘 낮 미사는 그 신비를 한층 더 깊이 묵상하게 한다. 오늘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탄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신비의 심연을 바라보게 된다.
1.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요한복음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1,14)는 선언은 그저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표면적인 사실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요한이 사용한 헬라어 원문 eskēnōsen은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라는 뜻을 지닌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던 ‘계약의 장막’(탈출 25,8; 민수 35,34)을 떠올리게 한다. 즉, 하느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머무르시는 분, 우리 가운데 거처를 이루신 분이 되셨다. 그분은 멀리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하느님, 인간의 기쁨과 고통, 시간과 공간 안으로 스스로 들어오신 하느님이시다.
2. 창조주이신 말씀이 피조물 안에 머무르신다.
요한복음은 “그분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그분은 하느님이셨다”(1,1)라고 선포한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다(1,3). 그러므로 강생의 신비란 창조주께서 당신의 피조물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 스스로 시간과 공간 안에 들어오시고, 무한하신 분이 유한함을 입으신 사건이다.
성 아타나시오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신성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De Incarnatione Verbi Dei, 54) 이것이 오늘 본기도가 말하는 놀라운 진리이다. 곧,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기에 인간은 하느님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영광의 역설: 낮아지심 속의 높아지심
요한은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1,14) 그러나 이 ‘영광’은 세상의 눈에 보이는 화려한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낮아지심의 영광, 곧 십자가의 영광이다. 요한복음 전체는 이 역설을 중심으로 흐른다.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질 때, 나는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단순한 겸손의 모범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을 권위로 드러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연약함을 통해 당신의 전능을 보여주신다.
4. 그분을 맞아들이는 자, 하느님의 자녀가 되다.
요한은 덧붙인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1,12) 이 자녀 됨은 혈통이나 인간의 욕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1,13).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외적인 사건으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마음에 받아들임으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루카 복음이 마리아에게 전한 말씀처럼, “성령께서 너에게 내리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감쌀 것이다.”(루카 1,35) 그 성령의 능력이 오늘 우리 안에도 역사하여,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
5. 하느님의 사랑, 인간의 단순함 속에
히브리서(1,1-3)는 이 말씀의 위대함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아들이 “만물을 상속받으신 분이며, 만물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분은 이 영광을 버리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낮아지심을 통해 당신의 가장 참된 영광을 드러내셨다. 성탄은 바로 이 역설의 축제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아기가 되시고, 무한하신 분이 우리 품에 안기신다.
6. 성탄의 신비,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성탄의 신비는 2천 년 전 베들레헴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 속에 장막을 치고 머무르신다. 가난하고, 연약하며, 사랑을 기다리는 이웃 안에서, 또 우리의 단순한 기도와 선의의 행위 속에서, 그분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머무르신다. 그러므로 성탄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사건이며, 또한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축제이다. “여러분의 가정과 삶 속에, 오늘도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평화와 은총이 충만하기를 빕니다.” 아멘.
김건태 신부님_어둠 속을 비추는 빛
[말씀]
■ 제1독서(이사 52,7-10)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한 예언자, 흔히 제2 이사야라 불리는 예언자가 다가올 해방을 선포합니다. 이 선포의 말씀은, 말씀만으로 이미 해방자이신 하느님을 향해 서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감동적인 말씀으로 머뭅니다.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 제2독서(히브 1,1-6)
히브리서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오늘 말씀은 마치 복음서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 되는 그리스도의 신원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 유다인들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논리를 통해 펼쳐지면서 “아드님”의 의미를 밝히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히브리서 저자는 이 “아드님”이 천사들보다 더 위대한 존재임을 신학적으로 증명하는 가운데 결국 천사들도 모두 경배해야 할 대상이라고 가르칩니다.
■ 복음(요한 1,1-18)
복음저자 요한은 자신의 기나긴 사도 활동 내내 추구해 왔던 깊이 있는 묵상을 통하여 스승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밝힙니다. 그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반영하는 “말씀”이 창조와 창조의 연속인 역사를 통하여 어떻게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는지 간결한 문체로 서술합니다. 창조의 순간부터 싹이 트고 자라나기 시작한 이 광채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며, 이 광채는 또한 그분을 향하여 서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발산하기 시작합니다.
[묵상]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제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입니다. 저 멀리 하늘 높은 곳에만 계신 분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 숨어계시는 분도, 우리의 삶, 때로 너무 힘겨워 어찌할 줄 모르는 우리의 삶에 무심하신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로지 이것 하나를 위해서 그분은 신성을, 하느님이심을 포기하고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겁니다.
구원이, 영원한 행복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면, 이제부터 또다시 시작입니다. 이 하느님의 모습보다 우리를 더 기쁘고 든든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사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람 되셨다는 것은 사람의 모든 것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차갑고 지저분하고 역겨운 마구간, 그리고 구유! 예수님은 바로 배고픔과 목마름과 헐벗음으로 차가운 이 세상, 탐욕과 시기와 질투로 지저분한 이 세상, 불의와 불목과 증오로 역겨운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겁니다.
누가 꼬집으면 아픔을 느끼는 우리의 모습, 누가 걷어차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우리의 모습, 불필요한 일에 불안과 조바심을 느끼며, 유혹에 쉽게 빠지는 나약한 우리의 모습, 심지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겁니다.
오로지 사랑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 하느님 사랑이 새겨져 있는 사람들, 아무리 부인해도, 아무리 모른 척해도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사랑을 말할 자격도 없었을 것이고, 실천할 용기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을 말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임을 그대로 드러내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이렇게 철저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감동적인 일입니다. 가슴 벅찬 일입니다. 넘어져 있는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북돋아 주는 현실입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며, 어제의 삶을 되새기고 또 내일의 삶을 기다립니다.
앞으로의 삶이 더 힘들게 펼쳐진다 해도, 이젠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사람이 되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병자를 위한 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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