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정 성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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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81 박영희 [corenelia] 스크랩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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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정 성화 주간] 마태 2,13-15.19-23 “말씀이 이루어졌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을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나자렛 성가정의 모범을 기념하며 본받고자 하는 축일이자,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우리 각자의 가정을 사랑이 넘치는 행복의 보금자리로 가꾸어 갈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가톨릭 전례의 핵심 중 하나인 성탄 팔일 축제 기간에 이런 축일을 지낸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가정 공동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는 반증이겠지요.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느님 중심’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서 하느님을, 그분 뜻을 따르는 일을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며 소홀히 여기는 사이, 분열과 갈등이 만연한 세상의 분위기에 물들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가정에 조그마한 시련만 닥쳐와도 서로 상대방 탓을 하며 비난하기에 바쁘지요. 둘째는 ‘자기 중심’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남들이야 어찌되든 나만 편하고 잘 되면 된다는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에 뿌리깊게 박혀버린 겁니다. 그래서 가족끼리도 절대 손해보거나 희생하지 않으려고 듭니다. 내가 이만큼 해줬으면 당신도 나에게 이만큼은 해주어야 한다는 보상심리로 서로를 바라보니 억울한 일, 서운한 일이 자꾸만 쌓여 갈등이 되고 다툼이 되지요. 가족이라는 이유로 상대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건 많은데, 정작 나 자신은 그런 가족이 되려고 하지 않으니 “가족이 남보다 못하다”는 볼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나자렛 성가정을 동경합니다. 예수님의 가정에는 그런 갈등이나 다툼 없이 기쁘고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헤로데의 위협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밤중에 급하게 짐을 챙겨 머나먼 타국 이집트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안된 산모와 갓난 아기를 데리고, 그것도 한밤중에 이동한다는 것은 굉장히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한 힘들게 일궈놓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 하루 먹고 살 길이 막막한,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 없는 ‘무모한 도전’이지요.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이처럼 큰 고통과 시련 앞에서 서로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다더니 왜 이토록 힘들고 괴로운 길로 이끄시느냐고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밀 이삭에 낟알이 영글려면 따가운 햇볕과 거센 바람을 견뎌야 하듯, 하느님께서 부족한 나를 통해 당신의 큰 뜻을 이루시려면 그 과정에 고통이 따르기 마련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고통과 시련이 그들에게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더 굳건하게 만드는, 서로에 대한 신뢰로 더 단단하게 일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더해져야 비로소 그분 뜻이 완성되지요. 그 요소는 바로 우리의 ‘순명’입니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일이 자녀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려면 그 말씀을 흘려듣지 않고 실행에 옮겨야 하듯, 하느님 말씀이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표징이 되려면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셉은 꿈에 주님의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 말씀에 군말없이 따릅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라는 명령에도, 겨우 자리잡은 이집트를 떠나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에도 어렵다, 힘들다 토달지 않고 즉시 순명한 것이지요. 그리고 마리아 역시 묵묵히 그런 요셉을 따릅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자신들을 ‘살 길’로, 더 나아가 가장 좋은 길로 이끄실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토달고 버텨봤자 시간만 지체되고 그만큼 괴로움만 커질 뿐, 결국엔 다 그분 뜻대로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뜻과 계획을 다 내려놓고 하느님을 마음 안에 모셔들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자 막막하고 암울한 상황에서도 ‘길’ 보이고 ‘답’이 보였지요.
하느님 말씀에 우리의 순명이 더해지면 그분의 선하신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렇게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진 예가 두 번이나 나오지요. 하느님께서 요셉과 마리아를 헤로데의 손아귀에서 구해내심으로써,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아버지 헤로데를 닮아 폭정을 일삼던 아르켈라오스를 경계하는 요셉과 마리아의 뜻을 받아들여 그들을 유다 땅이 아닌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에 정착하게 하심으로써 “그는 나자렛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명하시고 요셉은 순종하며 마리아는 따르는 ‘믿음의 팀플레이’를 통해 모든 어려움과 변수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계획하신 선한 뜻이 이루어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성가정의 모범이자,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이유입니다. 가족들이 다 세례를 받더라도 하느님 중심으로 살지 않고 내 뜻과 고집을 내세우면 쓰라린 실패를 겪고 좌절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가족 구성원들이 마음을 하나로 모으지 않고 각자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려 들면 신앙이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되지요. 그러니 가족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하나된 마음으로 하느님 뜻을 따라야 하는 겁니다.
결국 ‘성가정’이란 하느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그분 뜻이 성취되게 만드는 ‘믿음의 공동체’이자,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사랑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한 개인으로써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할 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따로 놀면 성가정이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어주신 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있음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나도 힘들지만 힘들어하는 가족들을 위해 내가 기꺼이 한 발 더 움직이고 조금 더 고생하는 희생과 배려를 통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라는 뜻입니다. 그 사랑의 과정에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더 깊게 만들고, 그렇게 깊어진 사랑을 통해 주님께 대한 가족 구성원 모두의 믿음이 더 굳건해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성가정의 모습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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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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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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