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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5년 12월 29일 (월)성탄 팔일 축제 제5일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가톨릭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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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수원 교구 묵상글

187087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12-28

김건태 신부님_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성가정

[말씀]

 

■ 제1독서(집회 3,2-6.12-14)

 

기원전 2세기경 이스라엘 지혜문학은 집회서 유다인 저자의 입을 빌어 부모에 대한 효도를 인간사회의 으뜸 덕목으로 가르칩니다. 자식의 품행은 무엇보다도 먼저 부모, 특히 노부모에 대한 태도로 측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자식은 마땅히 부모를 공경하고 삶의 체험이 풍부한 부모의 조언과 충고를 받들어야 합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는 결국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구체적인 길이므로 효도하는 이에게는 필요한 재물과 건강과 구원의 전제조건인 용서가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 제2독서(콜로 3,12-21)

 

사도 바오로가 볼 때, 한 인생의 성공은 그가 속해 있는 집안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보다 보편적인 가정 곧 교회 안에서 구체화하고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오로는 인간상호간의 사랑 관계를 바탕으로 신앙공동체 구성원 상호간의 보편적 관계를 묘사합니다. 남편과 아내, 자식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사랑의 끈으로 맺어져야 하듯이, 교회 구성원 상호간의 관계도 마땅히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등으로 표현되는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 복음(마태 2,13-15.19-23)

 

예수님이 어떻게 새로운 모세인지, 다시 말해서 새로운 이집트 탈출을 통하여 한 백성을 탄생시키는 새로운 모세인지를 밝히기 위해 복음저자들 가운데 마태오만이 성가정의 이집트 피신, 특히 이집트로부터의 귀환을 힘주어 설명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요셉이 성가정의 성실한 가장,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에 옮기기 위하여 죽음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 가장의 참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에 충실한 인물로서 성가정을 책임져나갈 것입니다.

 

 

 

 

[새김]

 

성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성가정은 효도를 으뜸으로 하며(제1독서) 사랑과 이해와 순종에 기초한 가정을 말합니다(제2독서). 주님께서 아버지를 공경하게 하셨고 어머니의 권위를 보장해 주셨기 때문이며, 남편에 대한 순종과 아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식에 대한 이해 속에서 가정은 비로소 행복을 느끼며 주님 사랑을 가시적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공동체의 바탕이 되는 각 가정이 이렇게 성가정을 이룰 수 있을 때 교회 또한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하고 역설합니다.

 

 

 

성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성가정은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가 겪거나 겪게 될 고통을 함께 나누어 짊으로써 그 고통을 가족 유대의 근본적 토대로 승화시켜 나가는 가정을 말하며, 그 모범을 우리는 아들 예수님이 짊어져야 했던 고통에 늘 함께하셨던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찾습니다. 이 가정은 고통 없이 그려볼 수 없고, 고통 없이 이루어질 수 없던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족 구성원을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인 사랑 없이 존재할 수 없던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의 마지막 주간, 한 해 동안 우리 가족 공동체, 더 나아가 신앙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내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 구성원의 고통에 함께하려 노력했는지 아니면 그 고통을 더욱 무겁게 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고 다짐하는 시간으로 밝아오는 새해를 맞이하셨으면 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2,13-15.19-23: 이집트 피난 

 

 

1. 가정, 강생의 신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도구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신비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공동체인 ‘가정’을 통하여 구원이 역사 안에 뿌리내리도록 하신 사랑의 신비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품, 곧 가정의 품을 원하셨다.”(Sermo 184,1) 즉, 하느님은 구원의 계획을 가정의 형태로 실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사는 나자렛의 삶을 통하여 인류의 삶을 완전히 체험하셨다. 따라서 강생의 신비는 단순히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이 가족의 일원이 되셨다.”는 사건이기도 하다. 

 

2. 가정의 시련과 하느님께 대한 신뢰

오늘 복음은 “이집트 피난” 사건을 다룬다. 아기 예수, 마리아, 요셉은 예언자들의 말처럼(호세 11,1)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피난길에 오른다. 천사는 요셉에게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13절) 말하며, 가족을 한 몸으로 묶는다. 이 표현은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의 연대”를 상징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묵상한다. “요셉은 단지 순종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보호자였다. 그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아기와 어머니를 보호하였고, 그들의 피난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의 행위였다.”(In Matthaeum homiliae, 8,2) 이 나자렛 가정은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사랑으로 서로를 지탱하는 가족의 모범을 보여준다. 가정의 신앙은 평화로운 순간에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서로를 지켜주는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3. 나자렛의 사랑: 일치와 협력의 모범

아기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으로서 부모의 보호가 필요했다. 마리아와 요셉은 단순히 아이를 양육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함께 이룬 협력자들이었다. 교부들은 이 점을 강조한다. 성 암브로시오는 말한다. “요셉의 침묵은 믿음의 언어였고, 마리아의 순종은 은총의 통로였다.”(Expositio in Lucam, II,45) 이렇듯 가정의 신앙은 말보다 순종과 행동으로 증거되는 것이다. 그들의 일치는 인간적인 사랑의 조화이면서 동시에 하느님 뜻에 대한 응답의 일치였다. 

 

4. 가정의 본질: 사랑 안의 개방성

나자렛 성가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첫 번째 교훈은, “가정의 참된 의미는 사랑 안에서만 존재한다.” 사랑은 모든 시련을 이기게 하고, 서로를 결합해 주며, 심지어 가정의 상처마저 치유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했다. “성가정 축일은 가정이 지녀야 할 모든 가치, 사랑, 헌신, 희생, 정덕, 생명 존중, 노동, 평화, 환희를 이해하는 열쇠이다.”(Homilia in Festum Sanctae Familiae, 1980) 사랑이 없는 가정은 구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사랑만이 가정을 회복시키며,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나게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그분이 현존하시는 곳에 참된 가정의 생명이 있다. 

 

5. 가정의 신앙적 사명: 하느님께 열려 있는 공동체

두 번째로, 가정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이다. 가정은 사랑의 학교이며, 생명의 성소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가정은 교회의 가장 작은 세포이며, ‘가정 교회’로서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이다.”(2204항) 따라서 진정한 가정은 하느님께 열려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기도와 말씀, 미사와 성사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꾸는 곳이 되어야 한다. 가정이 종교적 감각을 잃을 때, 인간적 사랑조차 쉽게 흔들린다. 나자렛 가정처럼,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6. 개방된 가정: 세상을 위한 사랑

세 번째로, 나자렛 성가정은 세상에 닫히지 않은 가정이었다. 그들은 세상과 타인을 위한 가정이었다.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마태 2,23)으로 불리심으로써, 가난하고 평범한 모든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주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가난을 통해 하느님의 부요를 드러내셨다. 나자렛의 겸손 속에서, 하늘나라의 문이 열렸다.”(Homiliae in Evangelia, 8,3) 가정은 사랑 안에서 개방되어야 한다. 사랑이 닫히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이웃에게 따뜻함을 전하고, 사회 속에서 희망의 표징이 되어야 한다. 

 

7. 가정의 영성: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일치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서에서 이렇게 권고한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버지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십시오.”(콜로 3,18-21)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질서”를 의미한다. 교리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을 드러내며, 부부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징이다.”(1617항) 그리스도와 일치된 가정은, 사회의 작은 교회로서 서로를 거룩하게 이끌어준다. 그 안에서 세대 간의 이해, 신뢰, 생명 존중이 자라난다. 

 

결론: 하느님의 축복 안에 세워진 가정

진정한 가정의 기적은 하느님 사랑의 축복 안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사랑은 약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새로워질 때 완전해진다. 성가정의 모범은 우리가 가정 안에서 사랑과 용서, 기도와 봉사를 배우도록 초대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가정 축일 강론에서 이렇게 마무리했다. “성가정은 교회의 첫 학교이며, 인간이 사랑을 배우는 첫 자리다. 나자렛의 조용한 집에서 세상이 구원의 길을 배웠다.”(Homilia, 1981.12.27) 

 

전삼용 신부님_딸 가진 부모님들 필독: 사윗감 고를 때 '이것' 하나만 확인하세요 

 

 

찬미 예수님.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본래 교황청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앙보다 더 거대한 집착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왕조의 보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잇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들'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왕비였던 아라곤의 캐서린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그는 하느님의 법을 자신의 뜻에 맞게 고치기로 결심합니다.

교황청이 혼인 무효를 허락하지 않자, 그는 "내 가족과 왕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교회의 법도 필요 없다"며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어 이혼을 감행합니다.

그는 이것이 가문을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가장의 선택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가정은 피바람 속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첫 번째 아내 캐서린은 쫓겨나 외롭게 죽었고, 두 번째 아내 앤 불린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참수당했습니다.

그는 총 여섯 번이나 결혼했지만, 그 과정에서 아내들은 죽거나 버림받았습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자녀들이었습니다.

딸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어머니가 처형되거나 쫓겨나는 것을 보며 공포 속에 자랐고, 훗날 서로의 종교를 탄압하며 '피의 메리(Bloody Mary)'라 불리는 살육의 역사를 썼습니다. 

 

헨리 8세는 임종 순간, 자신이 세운 교회의 의식이 아니라 가톨릭 사제를 찾으며 두려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그가 신앙을 버리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튜더 왕조는 결국 엘리자베스 1세를 끝으로 대가 끊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가장이 하느님의 뜻(혼인의 신성함)을 버리고 인간적인 계산(아들 욕심)을 선택했을 때, 그 가정은 가장 화려한 왕궁에 살면서도 가장 비참한 지옥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인물이 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입니다.

그는 말년에 하느님의 보호하심보다 자신의 '외교술'을 더 믿었습니다.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고 가족(왕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그는 이방 공주들과 정략결혼을 하고 그들이 가져온 우상들을 위해 산당을 지어주었습니다.

"가족을 평안하게 해 주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인간적인 계산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진노하셨고, 그의 사후 나라는 남북으로 쪼개져 서로 칼을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들여온 우상이 자식들의 미래를 찢어놓은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삼위일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랑을 주는 이(Lover, 성부), 사랑을 받는 이(Beloved, 성자), 그리고 그들 사이의 사랑(Love, 성령)." 가정도 이 모델을 따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Love, 성령)을 주는 존재(Lover)이고, 아내는 그 사랑을 받아(Beloved) 순종하며, 그러면 그 삼위일체 사랑이 완성된 사이에서 새로운 생명(자녀)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엄마는 자녀와 또 이런 삼위일체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설계하신 가정의 질서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의 성령을 통한 사랑 안에서 교회가 탄생한 것과 같고, 그렇게 탄생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교회와의 관계에서 선교를 통해 새로운 자녀를 탄생시키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 모델이 가정에도 적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가 온전한 '사랑을 주는 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수도꼭지가 저수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물을 줄 수 없듯이, 아버지도 하느님께 연결되어 사랑을 공급받지 못하면,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자기 욕심이나 강요뿐입니다.  

 

자연계를 보면 이 원리가 더 명확해집니다.

아프리카의 군대개미는 눈이 퇴화하여 앞서가는 개미가 남긴 냄새(페로몬)만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선두 개미가 길을 잃어 냄새를 놓치고 자기 꼬리를 따라 돌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뒤따르던 수만 마리의 개미 떼가 거대한 원을 그리며 뱅뱅 돌다가 집단으로 탈진해 죽습니다.

이를 '앤트 밀(Ant Mill, 죽음의 소용돌이)'이라고 합니다. 

 

가장이 하느님이라는 영적 방향(냄새)을 놓치고, 자신의 꼬리(욕망이나 불안)를 물고 돌기 시작하면, 그를 믿고 따르던 온 가족이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 공멸하게 됩니다. 

 

반면 철새들의 이동을 보십시오.

기러기 떼가 V자로 수만 킬로미터를 비행할 수 있는 것은, 맨 앞의 리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지구의 '자기장'을 느끼며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리더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날면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자기장)에 순종할 때 무리 전체가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가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자기장)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따르는 존재여야 합니다. 

 

또한, 아버지는 가정의 '피뢰침'과도 같습니다. 피뢰침은 벼락이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맞았을 때,

그것을 품고 있지 않고 땅으로 안전하게 흘려보내 건물을 보호합니다. 아버지가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의 시련과 스트레스라는 벼락을 맞았을 때 그것을 가족들에게 폭발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아버지는 그 고통을 하느님께로 흘려보내(Grounding) 가정을 안전하게 지킵니다. 

 

오늘 복음의 성 요셉은 바로 이 '자기장을 읽는 아버지'이자 '가정의 피뢰침'이었습니다.

헤로데가 아기를 죽이려 할 때, 요셉은 꿈을 꿉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한밤중에 갓난아기를 데리고 말도 안 통하는 이집트로 가라니,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상식보다 하느님의 꿈(계시)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했기에,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의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은 맑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데, 노아는 산 꼭대기에서 거대한 배를 짓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쳤다고 조롱했지만, 가족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여 배 짓는 일을

도왔습니다.

노아의 권위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가 맑은 하늘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경고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상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행동하는 아버지 덕분에 가족 모두가 구원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진정한 가장의 권위는 큰 목소리나 경제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느님 앞에 무릎 꿇는 그 모습에서 나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도 어린 시절, 미사 중에 기도하는 아버지 루이 마르탱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빠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성인들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빠의 얼굴에는 천국이 비치고 있었다." 

 

데레사의 아버지는 훈계로 자녀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하는 그 '등'으로 가르쳤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녀들에게는 가장 큰 안정감이요, 따라야 할 이정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의 가장 여러분, 그리고 부모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는 단순히 개인의 신심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군대개미의 죽음'을 막고, '기러기의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가장의 기도는 가정이라는 배의 키를 잡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딸이 있고 딸을 시집보내려고 할 때, 그 사위가 될 사람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가 자기 뜻대로 가정을 이끌 것인지, 아니면 하늘의 뜻을 찾는 기도하는 사람인지.

그것에 따라 딸과 손주들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물론 딸도 그 권위에 순종하여 생명을 낳는 지혜로운 여인으로 키워야 합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 모두가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묻고 듣는 '요셉 같은 가장',

'요셉 같은 신앙인'이 되기를 청합시다.

하느님께 무릎 꿇는 아버지라야 가족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이병우 신부님_"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마태2,13) 

 

'예수님이 가장인 성가정!' 

 

오늘 복음(마태2,13-15.19-23)은 '아기 예수님께서 이집트로 피신하셨다가 돌아오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자는 축일'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은 '가정성화주간'입니다.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성가정을 이룰 것을 다짐하는 주간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는 집집마다 십자고상이 걸려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십자고상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심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격 형성과 참성공 여부'가 가정에 달려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은 부부 사랑과 엄마 뱃속에서부터 시작된 사랑을 먹고 자라납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충만히 먹고 자란 사람들은 훗날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때문에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방식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 번째 권고문인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을 통해 가정의 위기를 언급하시면서 무너져 가는 가정 공동체를 살리자고 호소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부부 사랑과 자녀들의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집회3,2-6.12-14; 콜로3,12-21)는 '가족 사랑의 실천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가정, 예수님을 참주인으로, 참가장으로 모시고 있는 가정'이 성가정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내어줌의 사랑이 넘쳐나는 가정'이 성가정입니다. 

 

이런 성가정을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 유딧2,28) 

 

 

송영진 신부님_<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강론>

 

(2025. 12. 28.)(마태 2,13-15.19-23)

 

 

 

<주님께서 맺어 주셨으니, 주님께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3-15).”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마태 2,19-23).”

 

 

 

1) 우리는 ‘성가정’이 정말로 많은 고난을 겪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고난들은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자들,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메시아를 배척한 자들의

 

박해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가정이 겪은 고난 자체가 아닙니다.

 

그 고난들을 성가정이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또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만일에 성가정이 겪은 고난들만 생각하고, 그 고난들을

 

인내하고 극복한 과정은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병’만

 

보면서 ‘치료법’은 보지 않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가서 “힘내라.” 라는

 

말만 하고 그친다면, 힘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힘이 더 빠지는 일이 됩니다.

 

“힘내라.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 나도 도와주겠다.”

 

라고 ‘진심으로’ 말해야 합니다.

 

‘내 안에’ 더 이상 남아 있는 힘이 없다면 ‘밖에서’

 

그 힘이 와야 하는데, 신앙인들은 그 힘을 하느님에게서

 

얻고, 그리고 이웃에게서도 얻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은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2) 모든 부부와 모든 가정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부부이고 가정입니다(마태 19,6).

 

성가정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가정이니, 하느님께서 지켜 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성가정의 이야기들을 보면, 천사가

 

나타나서 알려 주거나 도와주었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천사가 도와준 것은 곧 하느님께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 쪽의 ‘믿음’과 ‘기도’와 ‘인내’도 중요합니다.

 

그들은 천사가 시키는 대로, 수동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했고, 하느님의

 

보호를 믿었고, 믿었으니까 기도했고 인내했습니다.

 

‘믿음’과 ‘기도’에서 ‘인내’가 생기고, ‘지혜’가 생깁니다.

 

 

 

3)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도와주실 때,

 

직접 도와주시기도 하고, 천사를 보내셔서 도와주시기도

 

하고,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도와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천사’도,

 

‘천사처럼 착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했을 때,

 

‘누군가’가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서 그것을 동방박사들에게

 

알리고, 동방박사들이 다시 그것을 요셉에게

 

전해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헤로데의 측근이나 군대에 나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고, 선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신할 때, 또 이집트에서

 

지낼 때, 미움과 박해만 받은 것은 아니고,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바친 황금, 유향, 몰약은

 

‘피난살이’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4) 각 개인의 가정을 보면, 어느 가정이든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고난과 위기들을 만납니다.

 

그런 때에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식구들 사이의 믿음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에, 요셉은 하느님을 믿었고,

 

또 마리아를 믿었습니다.

 

마리아도 하느님을 믿었고 요셉을 믿었습니다.

 

부부가, 또 식구들이 서로 신뢰하고 서로 의지하는 것은,

 

고난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큰 힘이 됩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도움을 잘 받는 방법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라는 예수님의 약속은(마태 18,20),

 

식구들이 마음을 모아서 함께 기도할 때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 공동체의 기도와 도움도 꼭 필요합니다.

 

어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교회 공동체에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공동체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2,26-27).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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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가정 축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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