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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5년 12월 30일 (화)성탄 팔일 축제 제6일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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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9일 수원 교구 묵상

187099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12-29

이병우 신부님_"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32) 

 

'여한이 없는 삶을 살자!' 

 

오늘 복음(루카2,22-35)은 시메온의 예언(노래)입니다. 

 

"환희의 신비 제4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주님께 바칩니다. 이 모습을 시메온이 보게 됩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고, 성령께서는 그런 그에게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이 은총에 대한 화답이 '시메온의 노래'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의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주님을 뵈었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시메온은 기뻐 노래합니다. 우리는 이 노래를 하루의 일과를 모두 마치고 끝기도 때 바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치면서 잠자리에 들어갑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잠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잠시 죽는 것'입니다. 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진짜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여한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해 주는 다리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시메온처럼, 그리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쁘게 맞이하려면,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간답게 살아야 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도 충실하게. 

 

"자매인 죽음이여, 어서 오세요."(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 유딧4,8) 

 

 

 

전삼용 신부님_관계는 우연이 아니라 눈물로 짓는 농사입니다 

 

찬미 예수님!

살아가면서 마음을 터놓을 진정한 친구 하나 얻기가 참 어렵습니다.

"나는 친구가 없어"라고 한탄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왜 관계 맺기에 실패하는지, 그 이유부터 짚어보려 합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는 관계 실패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여우는 두루미와 친구가 되고 싶어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나름대로는 정성을 다해 맛있는 수프를 끓였지요. 그런데 여우는 그 수프를 자신이 먹기 편한 납작한 접시에 담아 내왔습니다.

부리가 긴 두루미는 접시를 쪼아대기만 할 뿐 한 입도 먹지 못했습니다.

화가 난 두루미도 여우를 초대해 호리병에 음식을 담아 주었고, 주둥이가 짧은 여우 역시 굶어야 했습니다. 

 

이 관계가 깨진 이유는 명확합니다.

"나는 너에게 최선을 다했어(접시에 담아줌)"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자기 기준'의 봉헌이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먹을 수 없는 열매, 상대가 원하지 않는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그렇다면 친구를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간관계론의 대가 데일 카네기는 아주 명쾌한 비유를 듭니다.

"저는 딸기와 생크림을 무척 좋아합니다.

하지만 낚시를 갈 때는 딸기를 가져가지 않습니다.

물고기는 딸기가 아니라 지렁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을 낚을 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딸기만 들이밀면서 물고기가 안 잡힌다고 투덜대십니까?" 

 

많은 사람이 친구를 사귈 때 이 실수를 범합니다. 상대가 무엇에 굶주려 있는지(지렁이)는 보지 않고, 내가 주고 싶은 것(딸기, 내 자랑, 내 방식의 조언)만 줍니다.

상대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열매를 준비하지 않으면 관계의 바늘에 아무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상대가 원하는 대로만 해 주면 좋은 친구가 될까요?

그건 또 그렇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비굴해지거나 관계가 엉망이 될 수 있습니다. 

 

이솝 우화의 '당나귀와 강아지'를 보십시오.

당나귀는 주인이 강아지를 무릎에 앉히고 예뻐하는 것을 보고 몹시 부러웠습니다.

'나도 강아지처럼 굴면 사랑받겠지?'

당나귀는 앞발을 들고 주인 무릎에 뛰어올랐고,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렸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주인은 기겁하며 몽둥이로 당나귀를 때려 쫓아냈습니다.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당나귀에게는 당나귀만의 열매(짐을 나르는 듬직함)가 있습니다.

남이 주는 열매가 좋아 보인다고 해서, 자신의 본성에 맞지 않는 열매를 억지로 흉내 내어 주려 한다면, 그것은 상대에게 기쁨이 아니라 공포가 됩니다.

"나답게" 봉헌하지 못하면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친구, 나와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깊은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정답은 '내가 원하는 열매를 상대방이 맺을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씨를 뿌리고 가꾸는 것'입니다.

친구는 길가에서 줍는 것이 아니라, 농사짓는 것입니다. 

 

여기 한 선생님이 갱단 아이들을 친구로 길러낸 감동적인 실화가 있습니다.

영화 '프리덤 라이터스'의 실제 주인공 에린 그루웰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1994년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의 윌슨 고등학교 203호 교실. 그곳은 학교라기보다 전쟁터였습니다.

흑인, 라틴계, 아시아계 갱단으로 나뉜 아이들은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했고, 그들의 주머니에는 연필 대신 총과 마약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곳에 하얀 진주 목걸이를 한 백인 여교사 에린 그루웰이 부임했습니다.

아이들은 비웃었습니다.

"저 여자는 관광객이야. 며칠 못 버티고 도망갈걸." 아이들은 마음의 문을 철저히 걸어 잠갔습니다. 

 

그루웰 선생님은 그 차가운 벽 앞에서 매일 밤 눈물 흘렸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교과서 대신 자신의 사비를 털어 아이들에게 새 책을 사주고, 무엇보다 깨끗한 공책 한 권씩을 선물하며 말했습니다. 

 

"이건 너희들의 일기장이야.

너희의 이야기를 써주렴.

아무도 너희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지?

내가 들어줄게. 너희는 틀리지 않았어." 

 

그것은 선생님이 눈물로 뿌린 '신뢰의 씨앗'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반신반의하며 펜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꾹꾹 눌러왔던 슬픔과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학생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나는 16살 생일을 맞았다.

놀라운 일이다. 나는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

내 친구가 어제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언되지 않은 전쟁이다.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다." 

 

또 다른 학생은 이렇게 썼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건 관(Coffin) 뿐이다.

내 장례식에는 누가 올까?" 

 

그루웰 선생님은 그들의 일기를 하나하나 읽으며 함께 울어주었습니다.

선생님의 눈물이 아이들의 굳은 마음을 적셨습니다.

'아, 이 사람은 진짜구나.' 

 

선생님이 먼저 사랑의 씨앗을 뿌리자, 아이들은 닫혔던 마음을 열고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는

'친구'라는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의 명장면인 '변화를 위한 건배(Toast for Change)' 시간, 한 학생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교실에 들어오기 전까지, 저는 제가 18살까지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미래를 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프리덤 라이터스(Freedom Writers)』라 명명했고, 대부분 대학에 진학했으며, 그들의 일기는 전 세계에 희망을 전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150명의 갱단 아이들을 세상에서 가장 끈끈한 친구라는 기쁨의 곡식단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도 그들의 영원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울며 씨를 뿌리지 않으면, 결코 친구라는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만드시는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완벽한 친교를 맺고 싶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 당신께 봉헌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밭을 탓하지 않으시고, 가장 좋은 밭인 마리아에게 먼저 씨를 뿌리셨습니다. 

 

루카 복음 1장을 보십시오.

하느님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시고,

'은총이 가득한 이'라는 선행 은총의 씨앗을 먼저 뿌리셨습니다.

마리아가 그 은총을 받아들여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라는 순종의 열매를 내어드렸을 때, 하느님과 마리아 사이에는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완벽한 관계이자 영원한 파트너십이 형성되었습니다.

하느님도 거저 얻지 않으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먼저 주셨기에 성모님도 아드님을 봉헌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 씨앗을 뿌리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와 맞는 사람이 없다고, 진정한 친구가 없다고 외로워하십니까?

기다리지 마십시오.

우정은 완성된 채로 배달되는 상품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열매가 있다면, 내가 먼저 그 씨앗을 가지고 울면서라도 밭으로 나가야 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따뜻함을 주기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온기를 심어야 하고, 이해받기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경청을 심어야 합니다.

관계는 우연한 발견이 아니라, 눈물로 짓는 농사입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마음에 새깁시다.

"울며 씨 뿌리러 나간 자들이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단 들고 돌아온다."(시편 126,6)

이것이 친구를 사귀는 유일하고도 영원한 법입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2,22-35: 아기 예수의 성전 봉헌과 시메온의 찬가 

 

1. 성전 봉헌의 의미: 율법의 완성과 성취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받으신 후 성전에서 봉헌되신다.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에 충실하여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루카 2,23; 탈출 13,2 참조)는 말씀을 실천한다. 가난한 부모는 비둘기 한 쌍을 봉헌했지만, 사실 그 자리에 봉헌된 참된 제물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 점을 강조하며, “율법은 그림자요, 예표였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제물이 완전히 실현되었다.”(Epistulae 63,2)라고 설명한다. 곧, 예수님의 봉헌은 단순한 율법 준수가 아니라, 십자가의 봉헌을 미리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2. 시메온의 노래: 지금 여기서 드러나는 구원

성령께서 약속하신 대로,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알아본다. 그는 아기를 안고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시메온은 육안으로 아기를 보았지만, 믿음의 눈으로는 구세주를 보았다. 육신의 눈은 작은 아기를 보았으나, 영혼의 눈은 하느님의 구원을 보았다.”((Sermo 293,3) 구원은 단순히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미, 눈앞에서 실현되고 있는 은총의 현실임을 시메온은 보여준다. 우리 또한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이미 하느님의 구원을 보고 있는가를 성찰해야 한다. 

 

3. “반대를 받는 표징”: 십자가

시메온은 예언한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34절) 이 말씀은 십자가를 예고한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원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분이십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지만, 그분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사람은 무너지고 다시 일어난다.”(Homiliae in Ioannem 8,1) 곧,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의 표징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완고함을 드러내는 심판의 표징이 된다. 

 

4. 마리아의 고통과 교회의 길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35절)라고 예언한다. 이는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의 수난을 함께 겪을 것을 의미한다. 성 베르나르도는 이를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 아래에서 아드님의 창은 어머니의 영혼도 꿰뚫었다. 아들은 육체로 고통받으셨고, 어머니는 사랑으로 고통받으셨다.”(설교집)

마리아는 단순히 아들의 고통을 바라본 증인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걸어가야 할 고통과 믿음의 길을 가장 먼저 살아내신 분이시다. 그렇기에 교회는 마리아를 “고통의 성모”로 기억하며, 신자들이 신앙 안에서 겪는 모든 시련에 동반하시는 어머니로 모신다. 

 

5. 우리의 응답: 구원을 보는 눈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시메온처럼 지금 내 삶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알아보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일어서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 앞에서 걸려 넘어지고 있는가? 나는 마리아처럼 내 삶의 고통을 믿음 안에서 봉헌하며 하느님 뜻에 동참하고 있는가?

시메온의 노래는 단순히 과거의 기도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진 기도이다. “주님,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삶의 고백이 되기를 청해야 할 것이다. 

 

맺음말

아기 예수님의 성전 봉헌은 십자가의 예고이며, 시메온의 노래는 구원의 현재성을 선포한다. 마리아의 고통은 교회의 길을 미리 보여준다. 오늘 우리는 성전에서 아기를 품은 시메온처럼, 성체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구원을 지금 여기서 체험하며, 반대와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 충실히 봉헌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김건태 신부님_당신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신학생으로 프랑스 파리 가톨릭대학교내의 신학교에 머물며 공부하고 있었을 때, 그곳 신학생들과 함께, 특히 대품 곧 부제서품과 사제서품을 앞두고 베네딕토 봉쇄 수도원으로 피정을 간 적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수도원에서 수사 또는 수사 신부님들과 함께 성무일도 기도를 하면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수도원 고유의 전례 전통 가운데 하나는 끝기도가 끝나고 난 다음의 엄숙한 예식입니다. 수도원의 하루 일과는 대개 저녁 8시에 마감되고 새벽 4시경 시작되는 터라, 끝기도가 끝나는 시각은 8시경입니다.

 

끝기도가 끝나고 나면, 수사님들은 성당을 바로 떠나지 않고, 수도원 내부로 들어가는 복도를 향해 한 줄로 섭니다. 수도원장이 출구에서 성수를 들고 있다가, 한 사람 한 사람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면, 그분 머리 위로 성수를 뿌리는 예식을 성스럽게 거행합니다. 잠자리에 드는 것을 죽음으로 여기기에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예식인 것입니다: “주여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물론 이 예식 안에는 거룩한 죽음 후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곧 내일 아침을 희망하는 바람도 담겨 있습니다.

 

끝기도에서 매번 후렴처럼 올려지는 기도가 오늘 복음 속의 시메온의 노래입니다. 시메온은, 정결례 날을 이용하여 아기를 주님께 바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온 예수님의 부모로부터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언급이 세 번에 걸쳐 되풀이되는 것으로 미루어 예언자로 여겨지는 시메온은,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현시 속에 무엇을 본 것이 아니라, 두 눈으로 직접 구원이신 예수님을 뵈었으니, 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하는 외침의 근거입니다. 더는 바랄 것이 없으니, 떠나게 해 달라는 청원으로 들립니다. 시메온의 팔 안에서 구약성경의 마지막 신탁(神託)인 예수님이 바통을 이어받으십니다. 기나긴 예고 또는 예언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완성의 시간이 전개됩니다. 이 행복한 노인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하여 구약의 모든 예언자의 해설자 역할을 맡는 영광을 누립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과정이 이 시메온의 팔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메온의 팔에서 이루어진 이 역사적 과정을 눈여겨보며, 기쁨의 성탄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역사가 이제는 우리의 기도와 희생을 통하여 이어지도록 힘쓸 때입니다.

 

오늘 하루,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이웃에게 전하는 예언자로서의 삶, 시메온처럼 팔은 아니더라도 가슴에 주님을 모시는 사는 삶으로, 이 성탄 시기를 기쁨과 보람으로 채워나갈 것을 다짐하는, 신앙인의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은 ‘인류 전체’를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25-35)”

 

 

 

1) 시메온 예언자는, 적어도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메시아” 라는 것과

 

‘예수님의 수난’을 처음 예언한 ‘첫 예언자’입니다.

 

31절-32절의 ‘모든 민족들, 다른 민족들’은,

 

‘인류 전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라는 33절은, 요셉과 마리아가

 

‘모든 민족들’이라는 말 때문에 놀랐다는 뜻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요셉에게 나타났을 때에는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고 말했고(마태 1,21),

 

마리아에게 나타났을 때에는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라고 말했고(루카 1,33), 즈카르야에게

 

나타났을 때에는 “많은 이가 그의(요한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루카 1,33).

 

오늘날의 우리는 ‘당신 백성, 야곱 집안, 많은 이’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앙인”으로 해석하지만, 즉 인류

 

전체가 구원 사업의 대상이라고 믿고 있지만, “예수님은

 

‘모든 민족들’을(인류 전체를) 위한 메시아” 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시메온이 처음이었고,

 

당시에는 그것은 ‘놀라운’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노래’를 보면, ‘이스라엘’만 언급되어 있고,

 

‘즈카르야의 노래’에도 ‘이스라엘, 당신 백성, 주님의

 

백성’이라는 표현만 있고, ‘모든 민족들’이나

 

‘다른 민족들’이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물론 ‘뜻’으로는, ‘마리아의 노래’와 ‘즈카르야의 노래’는

 

모두 인류 전체의 구원을 찬양하는 찬미가입니다.>

 

그래서 표현만 놓고 볼 때, ‘시메온의 노래’는

 

특별히 중요한 예언이 됩니다.

 

 

 

2)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창세 12,3) 당신의 구원 사업의 대상은

 

‘인류 전체’ 라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긴 세월 동안 ‘구원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 또 ‘메시아는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마음속으로는 인류 전체의 구원과 메시아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더라도 그것을

 

직접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메온의 예언과 찬미를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 시메온이 ‘예수님의 수난’과 ‘마리아의 고통’을 예언했을

 

때, 마리아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데,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따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하실 일’만

 

기록되어 있고, ‘겪으실 일’에 대한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마리아에게 ‘좋은 일’만 말하고, ‘고통스러운

 

일’은 말하지 않고 숨겼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천사는 분명히 모든 것을 다 말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과 예수님이 겪게 될 고난을 다 듣고 그것을

 

각오한 상태에서 기꺼이 응답하고 순종했다는 것이,

 

그래서 ‘위대한’ 응답과 순종이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만일에 ‘고난’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응답하고 순종한 것이라면,

 

그 응답과 순종의 가치는 크게 떨어지게 됩니다.>

 

 

 

4) 29절-30절은, “구세주를 보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시메온의 노래는, 메시아를 뵙기 전에는 참된 안식도,

 

참된 평화도 없었는데, 이제 메시아를 뵙게 됨으로써 참되고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찬양입니다.

 

‘메시아를 뵙다.’는 ‘구원을 받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26절,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를 거꾸로 생각하면, “그리스도를 뵙게 되면

 

죽을 것이다.”가 되는데, 이 말에는, “죽음은

 

‘안식’을 누리는 일”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일은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이고, 구원은 그 평화와 안식을 얻어 누리는 일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해도, ‘죽음’이 두렵고 슬픈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신앙생활은 그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는 훈련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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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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