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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5년 12월 31일 (수)성탄 팔일 축제 제7일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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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0일 수원교구 묵상

187114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12-30

김건태 신부님_성탄을 바라보는 눈

 

성탄 대축일을 기뻐하고 경축하는 성탄시기에, 오늘 우리는 아기 예수님에 대한 예언자들의 시선을 마주합니다. 어제 복음에 등장하는 시메온,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하고 외친 시메온에 이어, 오늘은 나이가 많은 과부 예언자 한나를 만납니다. 구약성경이 문을 닫기에 앞서 신약성경의 갓난아기를 주시하는 것 같습니다.

 

한나는 여전히 거룩한 과부들의 본보기로 평가됩니다. 오랜 기간의 과부 생활 동안,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겨온 인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고아와 이방인과 함께 사회의 대표적 약자로 취급되어 온 과부, 어찌 보면 희망의 빛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절망의 여인이었으나,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이, 곧 공동체와 함께하며 기도와 단식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아온 인물입니다.

 

시메온처럼 이 여인도 성령의 인도로, 마리아와 요셉이 주님께 봉헌하기 위해 데려온, 이 아기가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구세주임을 선포합니다. 한나와 관련된 세 개의 고유명사가 가리키는 바가 이 아기가 구세주임을 밝혀줍니다. ‘한나’라는 이름이 총애를, 아버지 ‘프누엘’이 하느님의 빛을, 그녀가 속한 지파 ‘아세르’가 기쁨 또는 행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기가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아기, 그분의 빛이며 기쁨인 구세주이심을 암묵적으로 가리킵니다.

 

강생, 곧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심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이유는 단지 믿음이 부족해서만이 아니라, 강생 사건이 아무도 모르게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게 이루어진 사건! 단순한 믿음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성탄 사건! 이 사건을 제대로 알아보고 믿음으로 고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영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한나처럼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선사 받은 그 시선이 필요합니다.

 

성탄의 참 의미를 파악하고 그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가난하고 순수한 마음,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신앙인의 자세가 앞서야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 착한 목동들, 시메온과 한나, 동방박사들이 보여준 마음과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형제들, 특히 지금도 차갑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마구간에서 힘들어하는 이웃들 안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뵙고 경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속의 달력으로 마지막 시간인 오늘과 내일,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이웃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가, 그들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뵙고 사랑과 빛과 기쁨을 나누는, 기억에 남는 시간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가 2,36-40: 한나라는 과부의 기쁨 

 

1. 슬픔을 신앙으로 승화한 안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이어 성전에서 구세주를 알아본 한나 예언자를 전해 준다. 복음은 그녀가 어린 시절 결혼하여 7년을 살고 과부가 된 뒤, 84세가 되도록 성전에서 봉사와 기도로 살았다고 전한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녀의 삶은 상실과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상실을 하느님을 향한 전적 봉헌으로 바꾸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과부의 삶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과부의 고통은 세속의 위안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그들의 희망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충만해진다.”(Sermo 88,3) 한나는 세상의 위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참된 위로를 발견했기에, 자신의 삶 전체를 주님의 성전 안에서 봉헌할 수 있었다. 

 

2. 성전에서 드러난 구세주의 빛

한나는 시메온과 함께, 아기 예수님 안에서 구세주의 도래를 알아본 이들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가 한 것은 단지 개인적인 기쁨이 아니었다. 복음은 분명히 말한다. “그녀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38절) 즉, 한나는 받은 은총을 홀로 간직하지 않고 증언의 사명으로 나아갔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점을 강조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 이는 반드시 다른 이에게 전한다. 증언은 은총의 자연스러운 열매다.”(Homiliae in Matthaeum 33,4)라고 한다. 우리도 신앙의 기쁨을 나만의 체험으로 닫아 두지 않고, 다른 이들과 나누는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3. 과부 한나와 교회의 모습

전통적으로 교부들은 한나를 교회의 표상으로 보아 왔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의 위안에 매이지 않고, 주님을 기다리며 기도와 봉사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성 예로니모는 이렇게 말한다. “한나는 늙었으나 마음은 젊었고, 눈은 쇠하였으나 믿음의 눈은 밝았다. 그녀는 교회의 모상으로서, 성령 안에서 언제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였다.”(Commentarius in Lucam II,2,36-37) 안나의 긴 기다림은 교회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와 같다. 그 기다림 속에서 기도와 봉헌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다. 

 

4. 우리 삶의 적용

한나의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신앙의 지침을 준다. 첫째, 상실의 순간에도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할 것. 인간적인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을 신앙 안에서 승화할 때 새로운 의미와 열매가 태어난다. 둘째, 기도와 봉헌의 삶을 꾸준히 이어갈 것. 신앙은 특별한 순간만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충실함 속에서 다져진다. 셋째, 증언하는 신앙인이 될 것. 한나는 받은 은총을 나누었듯, 우리도 신앙의 기쁨을 세상 속에서 전해야 한다. 

 

맺음말

한나 예언자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노인의 감동적인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의 길, 곧 기다림과 봉헌, 증언의 길을 보여준다. 우리도 삶의 고통과 상실 속에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그분의 구원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겠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한나처럼 기쁨 안에서 구세주를 알아보고, 다른 이들에게 그분을 증거하는 참된 제자가 될 것이다. 

 

전삼용 신부님_루카 2,36-40 

 

상처 난 굴이 진주를 품습니다 

 

찬미 예수님!

1013년 독일, 알츠하우젠 백작 가문에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축복이어야 할 탄생은 곧바로 가문의 비극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척추가 뒤틀린 꼽추였고, 입천장이 갈라진 구개열이었으며, 뇌성마비로 혼자서는 설 수도, 걷지도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헤르만 콘트랙투스(Hermannus Contractus)', 즉 '비틀린 헤르만'이라 부르며 혀를 찼습니다. 

 

7살 때, 그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라이헤나우 수도원에 맡겨집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유배'였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초대'였습니다. 수도원의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헤르만은 매일 밤 자신의 몸에 갇힌 영혼의 비명과 싸워야 했습니다.

건강한 수도자들이 노동하고 찬미할 때, 그는 뒤틀린 손가락으로 간신히 펜을 잡거나,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더듬거리며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에게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자, 끊임없이 고통을 생산하는 고문 기계였습니다. 

 

어느 깊은 밤, 고통 때문에 잠들지 못한 헤르만은 십자가 곁에 있는 성모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상 모든 이가 걷고 뛸 때, 평생을 누워있거나 기어 다녀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사무치게 서러웠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는 왜 이렇습니까?

왜 저를 이 고통의 감옥에 가두셨습니까?" 

 

그 절규의 끝에서, 헤르만은 기적처럼 성모님의 눈물을 마주합니다.

아들의 십자가 밑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겪으신 어머니, '비탄의 성모'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 헤르만은 깨닫습니다.

자신의 이 으스러진 육체야말로 세상의 위로가 틈탈 수 없는, 오직 하느님의 자비만이 채워질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빈방'임을 말입니다.

건강한 다리로 세상 쾌락을 좇아다니는 이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골방의 신비'가 그에게 열린 것입니다. 

 

그 밤, 그의 영혼에서 터져 나온 노래가 바로 우리가 즐겨 부르는 『살베 레지나(성모 찬송)』입니다.

"하와이 그 자손들이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탄식하며 우나이다." 

 

이 가사는 책상머리에서 나온 신학적 수사가 아니었습니다.

똥오줌을 받아내야 하는 자신의 비참한 침상,

그 '슬픔의 골짜기' 바닥에서 길어 올린 처절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저주하지 않고, 그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빨아들이는 펌프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님." 

 

그의 뒤틀린 입에서 나온 이 마지막 구절은, 육체의 감옥이 무너지고 천상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환희의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추한 모습을 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상의 노래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의 상처가 입을 벌리자 그 틈으로 하느님이 들어오셨고, 그가 내뱉은 숨결은 교회의 영원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언자 안나의 삶도 헤르만과 다르지 않습니다.

안나는 결혼한 지 일곱 해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큰 결핍이자 '상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안나가 만약 남편과 백년해로하며 부족함 없이 살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평범한 아낙네로 살았을 것이고, 성전에서 84년을 머무는 '사명'을 수행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결국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도 없었을 것입니다. 

 

안나에게 남편의 부재라는 텅 빈 공간은, 하느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성소가 되었습니다.

결핍이 곧 하느님이 들어오시는 통로였습니다. 

 

자연계에도 이와 똑같은 이치가 있습니다. 진주조개의 이야기입니다.

조개 속에 날카로운 모래알이라는 이물질이 들어오면 조개는 극심한 통증을 느낍니다.

매끈한 속살에 박힌 모래는 뱉어낼 수도 없는 고통입니다.

조개는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체액인 나전질을 분비해 모래를 감싸고 또 감쌉니다. 

 

오랜 시간 고통을 감싸 안은 결과, 그 거친 모래알은 영롱한 '진주'가 됩니다.

상처가 없었다면 진주라는 보석도 없었을 것입니다.

안나의 84년 기도는 상실이라는 모래알을 예수님이라는 진주로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일본에는 '킨츠기(Kintsugi)'라는 독특한 도자기 공예 기법이 있습니다.

아끼던 도자기가 깨졌을 때, 그것을 버리지 않고 깨진 틈을 옻으로 붙인 뒤 그 위에 금가루나 은가루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깨진 상처(금)는 감추어야 할 흉터가 아니라, 도자기 전체를 가로지르는 황금빛 선이 되어 세상에 하나뿐인 독특한 무늬를 만들어냅니다.

그 그릇은 깨지기 전보다 더 비싸고 귀한 예술품으로 재탄생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깨진 마음을 버리시는 게 아니라, 그 틈새를 당신의 은총(금)으로 채워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으로 만드십니다.

상처 없는 매끈한 그릇보다, 은총으로 떼운 상처 입은 그릇이 하느님 보시기에 더 아름답습니다. 

 

성경의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평생 자신의 힘과 잔머리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야보크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엉덩이뼈(환도뼈)가 위골됩니다.

이제 그는 도망칠 수도, 싸울 수도 없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엉덩이뼈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야곱은 형 에사우 앞에 무릎 꿇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교만이 자리 잡고 있어서, 자기 힘으로 뭐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 온전히 자신을

낮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리를 절게 된 순간, 그는 비로소 제 힘으로 걷는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축복해 주지 않으시면 놓지 않겠습니다." 

육신의 힘이 꺾인 그 자리에 하느님의 권능이 들어왔고,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지금 감당하기 힘든 상실의 아픔이나 치유되지 않는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고 계십니까?

남들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불행한 것 같아 하느님을 원망한 적은 없습니까?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부족함이 없는 이들은 주님을 간절히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으로 배를 채우며 자신의 영혼을 더 병들게 할 뿐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받아들이기에 가장 완전한 장소는, 바로 나의 상실의 공간과 상처입니다.

복자 헤르만처럼, 예언자 안나처럼, 그 상처의 빈방을 하느님께 내어드리십시오. 

 

여러분의 상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가장 따뜻하고 거룩한

구유가 될 것입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2,38)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자!' 

 

오늘 복음(루카2,36-40)은 '한나의 예언'입니다. 

 

한나 예언자가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속량(구원)을 위해 오신 분이심을 예언합니다.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낸 한나 예언자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그런 그에게 구세주를 마주 뵙는 은총이 주어졌고, 그리고 구세주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이 은총을 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자 구세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구세주를 만나 부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은총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나 예언자의 삶에 머무면서, '바램'이라는 노래의 노랫말, 곧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노랫말이 떠올랐습니다. 

 

열매가 조금씩 익어가듯이,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사랑도 조금씩 익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늙음을 한탄하지 말고, 조금씩 익어가는 기쁨 속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죽을 때 결코 가져갈 수 없는 세상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더 마음을 두고, 이를 실행하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서로를 위해 기도하면서 노력해 봅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께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으니, 옛 종살이를 하며 죄악의 멍에에 짓눌려 신음하는 저희를 구원하여 주소서."(본기도) 

 

"주님, 세상을 떠난 민영여(데레사)의 영혼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유딧5,18) 

 

 

송영진 신부님_<‘간절함’이 없으면,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36-40).”

 

 

 

1)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는, “그 아기가

 

‘메시아’(구세주) 라고 증언하였다.”입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는, “구원받기를

 

갈망하면서 메시아 강생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은, 표현으로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나타내지만, 뜻으로는 ‘구원’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가 “예수님이 메시아” 라고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시메온 예언자’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루카 2,27).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

 

복음서 저자가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일부러 생략한 것도 아니고, 실수로 빠뜨린 것도 아니고,

 

‘기록할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됩니다.

 

<시메온 예언자의 이야기를 보면, 요셉과 마리아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2,33),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두 예언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거나 믿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은 사람들은

 

두 예언자의 말에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메온과 한나의 증언을 믿지 못했더라도,

 

정말로 간절하게 메시아를 기다렸다면,

 

관심을 갖거나 반박하거나 어떤 증거를 요구했을 텐데,

 

그런 반응이 아예 없었다는 것은,

 

‘간절하게’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됩니다.

 

기다림에 ‘간절함’이 없으면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탄생 후에, 예수님을 찾아간 목자들이 ‘아기에

 

관하여 천사에게서 들은 말’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을 때,

 

사람들은 그 말에 놀라워했는데(루카 2,17-18), 놀라기만

 

하고 그것으로 끝난 것 같습니다.

 

그 ‘놀라움’이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나타나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메시아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시는지, 즉 메시아께서 어디서 태어나셨는지

 

물었습니다(마태 2,1-2).

 

그때 헤로데 임금은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께서 태어나실 곳이 어디인지 물었고, 사제들과

 

학자들은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했습니다(마태 2,4-6).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제들과 학자들 가운데에는

 

베들레헴에 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한 명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동방박사들의 말을 믿었다면 당연히 갔을 것이고,

 

안 믿었더라도 확인하기 위해서 대표자 몇 명을 보내서

 

조사해 보라고 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메시아께서 태어나실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은 ‘아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는 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겠지만,

 

실제로는 ‘기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들은 ‘메시아 강생’ 자체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아테네인들의 모습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테네인들과 그곳에 머무르는 외국인들은 모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사도 17,21).”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사도 17,32).”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려 주고, 복음을 전해

 

주었을 때, 아테네인들의 반응은 ‘무관심’이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듣겠다는 말은,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배고프지 않다는데 억지로 음식을 먹일 수는 없습니다.

 

현대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하느님 나라, 내세, 구원, 영원한 생명 등을

 

‘허황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종교와 신앙 자체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스마트폰이나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모습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 24,38).”

 

<그렇게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고 해서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고, 더욱더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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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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