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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6년 3월 1일 (일)사순 제2주일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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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2월 28일 묵

188220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2-28

김건태 신부님_원수 사랑

시나이산에서 체결된 옛 계약의 중개자 모세가 사회관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취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중심으로 법 규정들을 열거해 나갔다면, 예수님은 이 규정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들을 지적하고 보완하는 데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모세는 악행을 열거하고 그에 상응하는 징벌을 성문화하는 데 만족했다면, 예수님은 이 악행을 온전한 사랑으로 극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분이 선포하고 완성하러 오신 하느님의 나라는 더욱 완벽한 신앙 자세를 기초로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를 향해 마음이 온전히 열려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좀 더 인간다운 사회, 서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살맛 나는 사회로 만들 수 있을까? 과연 그런 사회가 가능하기나 할까 하는 의구심도 갖게 됩니다.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여전히 미움이나 불신 상태에 머물러 있음에도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 사회구조라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서툰 지혜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시공의 제한을 받는 인간의 지혜, 근시안적이거나 때로 의도적으로 왜곡될 수 있는 인간의 지혜를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자세를 온전히 새롭게 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단순한 정의의 차원에서 제정된 법규들, 복수(復讐)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목적으로 제정된 동태복수법에 기초한 법규들과 비교해 볼 때, 보다 근원적입니다. 주님은 어제에 이어 오늘의 가르침, “원수를 사랑하여라”와 같은 근원적인 가르침이 인간사회의 가장 자연스러운 규범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시면서 비폭력을 역설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증오의 벽을 허물어버리는 사랑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모든 이에게 똑같이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은 우리 모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여라”하는 주님의 위대한 가르침 앞에서, 이 하나는 분명해 보입니다. 원수가 아닌 사람 사랑은 당연하다는 전제입니다! 원수까지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키기 위해서, 원수가 아닌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형제 사랑, 이웃 사랑 실천에 모자람이 없을 때, 원수 사랑도 가능함을, 원수도 사랑할 수 있음을 역설하시는 듯합니다. 이웃의 범위를 넓혀 원수까지도 담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위로와 성원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하루, 사랑 실천으로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보다 넓고 깊은 사랑으로 원수까지 이웃으로 담겠다는 의지로 이 하루를 꾸며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하느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게 되어라. 

 

오늘 복음은 우리를 가장 높은 신앙인 삶의 자리로 이끌어 준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4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하느님을 닮아가라는 초대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원수에게 유익하기보다,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밝히신다. 미움은 상대를 해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병들게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자신을 상처 입히는 것이다. 네가 그를 용서하면, 사실은 그보다 네 자신이 치유된다.”(Enarrationes in Psalmos 56,10)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관대함이 아니라, 영혼을 지키는 길이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이는 가장 높은 사랑의 표현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를 미워하지 말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으라는 명령이다.”(In Matthaeum Hom. 18,4)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저들을 용서하소서.”(루카 23,34)라고 기도하신 모습은 바로 이 말씀의 완전한 실현이다. 

 

예수님께서는 원수 사랑의 근거를 아버지 하느님께 두신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45절).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 없이 모든 이에게 베풀어진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태양이 악인에게도 빛을 비추듯, 의로운 영혼은 원수에게도 사랑을 비춘다. 이것이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다.”(Commentarium in Matthaeum 14,2) 교회는 이러한 삶을 거룩함(holiness)이라고 부른다. 교리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2013) 가르친다. 

 

사순 시기는 기도, 단식, 자선을 통해 회개의 길을 걷는 때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더 깊은 실천을 요구한다. 기도: 나를 힘들게 하는 이를 위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자. 단식: 음식을 끊는 단식뿐 아니라, 분노와 원망을 끊는 단식을 하자. 자선: 나를 대적한 이에게도 선을 베푸는 자선으로 나아가자.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닮아가는 길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간적 정의의 한계를 넘어 복음적 사랑의 완성으로 초대하신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며,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닮으라는 부르심이다. 이 사순 시기에 우리 각자가 마음속에 있는 작은 원망과 미움을 내려놓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며,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닮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참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완전한 사랑의 모습인 원수 사랑!' 

 

오늘 복음(마태5,43-48)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5,44-45ㄱ) 

 

참으로 힘든 사랑이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길이 참으로 힘든 십자가의 길입니다. 마음에 드는 이들과의 사랑도 벅찬데,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사랑이 너무나도 벅차게 다가옵니다. 저도 지금 이 사랑을 해야하는데 참으로 힘이 듭니다. 

 

지금 우리는 '은혜로운 때이며 구원의 날'인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가 우리에게 은혜롭고 구원의 날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이제와 영원히 죽지 않고 살기를 희망합니다. 그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십자나무에 달리셨을 때 몸소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내 좋을 대로 사랑하지 말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그 사랑 방법으로 너를 사랑하도록 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송영진 신부님_<사랑 실천의 목적은 ‘선의 실현’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1) 스테파노 순교자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모범이 되는 신앙인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사도 7,59-60).”

 

여기서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는,

 

“박해자들을 처벌하지 마십시오.”인데,

 

그들이 회개한다면 구원해 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박해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 것, 그것이

 

스테파노 순교자가 실천한 ‘원수에 대한 사랑’입니다.>

 

‘박해자 사울’에게 세례를 준 ‘하나니아스’도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신앙인입니다.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사도 9,17-19).”

 

<혹시라도, “주님께서 명령하시니까 어쩔 수 없이

 

사울에게 가서, ‘억지로’ 세례를 준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나니아스가 사울을 ‘사울 형제’

 

라고 부른 것을 보면, ‘억지로’ 한 것은 아니고,

 

‘진심으로’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 형제’ 라는 말은, 박해자 사울을 ‘형제’로

 

받아들였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박해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서 ‘사도 바오로’로

 

변화되었음을 인정하고, 교회 공동체로 받아들인 초대교회

 

신자들과 사도들도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이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사도 9,26-28).

 

 

 

2) ‘착한 사마리아인’도 원수를 사랑한 사람입니다.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강도당한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루카 10,33-34).”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 사이였는데,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억압하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이 품고 있는 원한과 증오심이 더 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도와준 일은,

 

원수를 사랑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원래는 ‘이웃 사랑 실천’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그 비유는, ‘이웃 사랑’에는 ‘원수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원수도 이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 똑같이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이웃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 있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라는 말도 중요한데, 그가 마음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어서

 

가엾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기도 하고, 가엾다고 느꼈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평소에 항상 사랑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는 일도 잘하게 됩니다.

 

반대로, 평소에 ‘사랑 없이’ 사는 사람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을 실천하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평소에 사랑 실천을 얼마나 잘하고 있느냐?”입니다.>

 

 

 

3)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닙니다.

 

좋아하는 것은 ‘감정’일 뿐이지만,

 

‘사랑’은 신앙인이 실천해야 할 ‘덕’입니다.

 

그리고 ‘사랑 실천’의 목적은 ‘선의 실현’입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구원’이라는 ‘하느님 선’의 실현을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

 

‘함께’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꾸짖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악’을 내버려 두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악인의 악행을

 

내버려 두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악을 물리쳐야 하고, 악행을 막아야 하고,

 

악인들을 회개시켜야 합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경우라면,

 

교회 전체가 나서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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