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활묵상 : 남몰래 지는 십자가의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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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29 강만연 [fisherpeter] 스크랩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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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십자가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거의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운명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이 지고 가야 하는 숙제 같은 짐처럼 여겨지는 것 같은 이미지입니다.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다 있을 겁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도 지는 것도 버거워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도 남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과연 어떤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일까요? 단순히 희생정신이 강해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인간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생정신을 발휘한다고 할 때 그런 희생으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남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게 감히 상상이나 가는지요? 굿뉴스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이 올라옵니다. 이 신부님이 10여 년 전에 경남 고성 올리베따노 수도원에 계실 때 수도원 주위에 방갈로가 있는데 한 번은 방갈로에서 신부님과 면담성사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예전 다른 글에서도 언급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 다른 건 기억이 나지 않는데 신부님이 십자가를 진다의 원어적인 의미를 설명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품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과 면담 후에 저는 헬라 성경이 없어서 그냥 영어성경을 찾아봤습니다. 우리는 진다고 할 때의 국어 사전적인 의미를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원어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면 십자가를 진다의 의미가 더 잘 피부에 와 닿을 수가 있을 겁니다. 품는 것이고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저를 선교한 자매님이 한 번은 제가 무슨 고민이 있어서 그분 가게에서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베드로, 남자의 넒은 가슴으로 이해를 해줬으면 해요" 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씩 이해가 잘 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있을 때 그분이 하신 말씀을 잘 떠올리기도 합니다. 인간 강만연이라는 작은 보잘것없는 이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님을 생각해서 내 작은 가슴을 더 크게 펼쳐서 안아보자는 식으로 감싸안으려고 노력할 때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바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그자리 신앙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년이 가도 이십년이 가도 신앙은 그자리에 있을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원칙은 예수님은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자기 것은 자기가 지어야 하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군에서 저는 통신병을 했습니다. 행군이나 군 작전시에 저는 무전기를 메고 이동해야 합니다. 행군을 할 때 체력적으로 지쳐 처지는 동료가 있다면 무전기 무게만 해도 상당한데 어떤 경우는 그 동료의 군장을 앞으로 해서 메고 행군을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제가 짐을 나누어 지자고 해서 군장을 분산해 동료들과 함께 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유사시는 아니지만 이게 만약 전시라면 어떨까요? 전시에서는 군장이 바로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생명줄이 되는 것입니다. 군장 자체를 져 주는 게 남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를 묵상할 때 한 번씩 어쩌다가 군에서 행군을 할 때 이 경험을 떠올려 묵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고 나서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어느 누구 하나 생색을 내지 않습니다. 나도 힘든데 네 군장을 메고 같이 갔는데 고맙게 생각하라고 하는 말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이건 세상에서 말하는 선행이라는 개념도 아닙니다. 만약 전쟁의 상황이라면 전우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부가 일심동체이듯이 내가 살아야 전우도 살고 전우가 살아야 나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과 싸우는 상황에서는 그래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이라는 적과 싸우는 용사입니다. 이때 세상이라는 적은 다른 게 아니라 세상 때문에 하늘나라를 볼 수 없게 하는 그런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푹 빠져 살게 되면 하늘나라를 꿈꿀 수 없게 되고 볼 생각조차도 하지 못할 겁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이런 현실에 있는 존재에 불과한 인생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적이 바로 우리가 견디고 이기고 가야 할 십자가인 것입니다. 분명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어야 하는 게 맞지만 힘에 부쳐 지기 힘든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십자가를 나누어 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상황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왜 남의 십자가를 지느냐고 야단을 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건 위대한 사랑 실천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잘 지었는지 여부에 따라 하늘나라에 잘 갈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늘나라에 잘 가지 못한다면 이 세상 표현으로 말하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될 것입니다. 결국은 남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큰 희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부활은 자신의 십자가를 온전히 잘 지은 사람만이 잘 부활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남의 십자가까지 몸소 지고 사랑을 나눈 사람은 그가 부활하는 모습은 단순한 부활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표현하는 말처럼 '화려한 부활'이 될 것입니다. 부활이라도 다 같은 부활이 아닐 수 있을 겁니다. 우리도 이왕 부활한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부활을 꿈꾸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일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부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도 잘 지고 가야 하겠지만 정말 예수님의 길을 잘 걷고 싶다면 힘에 부처 지쳐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십자가를 잠시만이라도 대신 져 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된다면 그것도 생색을 내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져 준다면 그 십자가는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서 그 십자가를 대신 져 준 사람에게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 영광은 무궁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십자가는 아주 힘든 십자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힘들고 상처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상처를 함께 나누고 같이 가슴 아파하고 서로 위로하며 사랑하는 것도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는 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를 품는 사람은 예수님을 가슴에 품는 사람과도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 속에 예수님이 바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언젠가 우리가 가는 본향에서도 예수님을 잘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예수님은 그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에게 잘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럼 나중에 예수님을 많이 만난 사람은 예수님도 우리를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당연할 겁니다. 우리도 많이 만나고 하면 누군가를 잘 기억하듯이 예수님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결국은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는 사람은 다른 표현을 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잘 질 수 있다는 말과도 같은 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십자가 속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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