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4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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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90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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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섬김의 삶
오늘 복음은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세 번째이며 마지막 예고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만을 데리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구원을 향한 당신의 고유한 순례 여정에 제자들을 참여시켜, 훗날 이들이 이 모든 여정을 증언하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예고와(16,21-23) 두 번째 예고와는(17,22-23) 달리 수난 예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보이지 않으나, 사실 그 반응은 오늘 복음의 어어지는 말씀에서 발견됩니다. 한마디로 몰이해입니다!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다가와 무엇인가를 청한다는 언급으로 이어집니다. 마태오 복음저자가 원전으로 사용했을 마르코 복음에는 제배데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이름이 직접 거명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두 아들의 자리를 어머니가 대신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르코 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오른쪽과 왼쪽 자리를 직접 청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마태오 복음 저자는 이들의 청원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두 사도의 명예에 흠을 내지 않으려는 차원에서 어머니를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속적인 자리로 취급되고 있는 오른쪽과 왼쪽 자리에 관한 진정한 의미와 수용에 관한 질문만큼은 두 사도에게 직접 건네십니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그것은 결국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 곧 그분의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을 받아들일 때 가능한 자리로 설명됩니다.
한편,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하는 언급에서, 우리는 이들도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애정어린 가르침이 펼쳐집니다. 오늘 말씀의 근본적인 메시지가 이 가르침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동일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사람이어야 하기에, 스승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면” 제자들도 마땅히 섬김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길에 함께하면서도 이해력이 한참 부족해 보이는 사도들은 결국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한 생을 섬김의 삶으로 채워나가신 분들입니다. 사도들은 아마도 섬김을 받고 싶은 유혹이 들 때마다, 오늘 스승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종으로서의 길을 걸어가셨ㅇ르 것입니다.
오늘 하루, 부족함이 아직 가득한 사도들을 사랑과 인내로 양성하여 교회의 기초로 세우시고, 그렇게 세우신 교회에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이웃을 정성껏 섬기는 삶으로 사순시기를 은혜로운 시기로 만들어나가는 신앙의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다시금 예고하시는 장면을 본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인간적인 권력과 영광의 자리를 꿈꾸고 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위하여 예수님의 나라에서 좌우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청하는 것은, 제자들의 내적 갈망이 여전히 세속적 기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 청을 거절하지 않으시면서, 오히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라고 물으신다. 여기서 “잔”은 수난을, “세례”는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라고 기도하셨던 바로 그 고통의 잔을 말한다. 제자들은 그 깊이를 알지 못했기에 “할 수 있습니다.”(22절)라고 대답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미성숙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이 결국 순교의 길을 걷게 될 것을 예언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영광의 자리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 길은 먼저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다. 그분의 제자가 되려는 이는 반드시 그분의 수난을 나누어야 한다.”(Enarrationes in Psalmos 75,11)
사실 제자들 모두는 인간적 욕망을 따라 영광을 원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라고 하시며 제자직을 가르치신다. 권위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자는 으뜸이 되려는 자가 아니라, 종이 되려는 자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땅의 왕국과 다르기 때문이다. 땅의 왕국은 지배와 권력을 의미하지만, 하늘 나라의 왕국은 사랑과 봉사를 뜻한다.”(Homiliae in Matthaeum 65,2) 교회도 이 가르침을 이어받아, 교황을 비롯한 모든 교회 지도자의 본질적 직무를 “섬김의 직무”로 이해한다. 교회 헌장도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늘의 스승께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음을 기억하면서, 형제들을 위하여 서로 봉사해야 한다.”(37항)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묻고 계신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속적 안락이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따르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진정한 부활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사순 시기, 우리는 섬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참된 권위는 섬김과 봉사에서 오며, 참된 제자직은 주님의 잔을 함께 마시는 데서 드러난다. 우리가 세상의 방식대로 크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낮아져 형제들을 섬길 때, 우리는 참된 제자가 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_<사순 제2주간 수요일>(3.4)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마태20,18ㄴ)
'예수님을 잘 따라가자!'
오늘 복음(마태20,17-28)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는 말씀과 '출세와 섬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며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 본질을 세 번에 걸쳐 예고하시면서, 이를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청탁을 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6-28)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닮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단순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그분의 뒤를 잘 따라갑시다! 오늘도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합시다!
오늘은 울 어머님 이정숙(사비나)의 6주기 기일입니다.
누구보다도 삶으로 예수님을 믿으며 따라가셨던 분,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쓰셨던 분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빌며, 우리를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전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님, 이정숙(사비나)와 이학우(안드레아)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송영진 신부님_<“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2-28)”
1)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열두 옥좌’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그런데 이 말씀은, 다음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그래서 ‘열두 옥좌’를 주겠다는 약속은, 사도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각자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충실하게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에게만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끝까지 충실하게 따르지 않고 스스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그 ‘옥좌’를 얻지 못했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즉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열두 옥좌’를 주겠다는 말씀을 듣자,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두 자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마태 20,21).
<아마도 자신들에게는 그렇게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두 사도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2)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그 옥좌’에 앉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는
말씀은, “내가 가는 십자가의 길을
너희도 따라 걸을 수 있느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하려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두 사도의 대답은, 표현으로는,
무슨 일이든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말이긴 한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저 막연하게 자신들의 희망과 각오를 나타낸 말입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두 사도가 나중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사도라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은, 하느님 나라에
그런 자리가 실제로 있다는 뜻은 아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뜻합니다.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당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잘 안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예수님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세례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들어갑니다.>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3) 두 사도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한 것은, 다른 사도들을 자기들보다 더 낮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한 것과 같기 때문에,
다른 열 제자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두 사도와 같은 명예욕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섬김과 낮춤을 말씀하십니다.
‘섬김’과 ‘낮춤’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일입니다.
자신을 버려야만 진정한 섬김과 낮춤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겉으로는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남보다 더 높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고, 그 ‘낮춤’과 ‘섬김’은
‘거짓 겸손’이(‘위선’이) 될 뿐입니다.
또, 그런 거짓 낮춤과 거짓 섬김으로 십자가를 진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죄가 될 뿐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진심으로’ 섬김과 낮춤을
실천해야 하는데, 그것은 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고(요한 13,14-15),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태 18,3-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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