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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6년 3월 7일 (토)사순 제2주간 토요일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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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6일 묵상

188331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3-06

김건태 신부님_모퉁이의 머릿돌

오늘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말씀 끝자락에서 바리사이들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유다교의 지도계급, 나아가 유다교 최고 의회 또는 법정(=산헤드린)을 구성하는 핵심 인물들이 대상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은 옛 전통을 이어받고 있던, 옛 계약 속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그 유명한 ‘포도밭 노래’(이사 5,1-7) 앞부분을 인용하시면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포도밭 노래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지중지하시는 포도밭 주인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후 구약성경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자리합니다. 물론 이 노래에서 이미, 포도밭인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는 백성, 그분이 원하시는 ‘질 좋은 포도’ 곧 ‘공정과 정의’가 아니라, ‘들포도’ 곧 ‘피 흘림’과 ‘울부짖음’을 내놓는 백성으로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포도밭의 주인인 하느님은 정당한 소출을 받아내실 목적으로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내십니다. 그러나 이 종들은 ‘피 흘림’과 ‘울부짖음’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더 많은 종을 보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마침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지만, 상속자를 처리하면 상속 재산을 모두 취득할 수 있다는 오판에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립니다.” 여기서 ‘포도밭 밖’이 예루살렘 밖에 위치한 골고타 언덕을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는 분명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을 예시하는 문구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악한 소작인들에 대한 공정한 판단과 의로운 처벌과 함께,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주는 일”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악한 소작인들과 선한 소작인들이 갈립니다. 하느님의 사업은, 그 가운데서도 핵심인 구원 사업은 이제 중대한 갈림길 앞에 섭니다. 새 소작인들이 옛 소작인들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참된 소작인들이 탄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새 소작인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흔들림 없이 지속될 것이며 완성될 것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은 우리에게, 나아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에 큰 기쁨과 함께 중대한 사명을 부여해 줍니다. 교회를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성실한 일꾼들의 모임으로 평가해 주신다는 자부심과 함께, 포도밭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소출을 바쳐야 한다는 사명, 공정과 정의를 바탕으로 서로를 아끼고 살피는 구원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명 앞에 섭니다.

 

오늘 하루, 남을 업신여김이 아니라 존경하는 마음,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모습,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으로 구원의 세계를 미리 맛보고 나누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저 자가 상속자다. 자, 저 자를 죽이자!” 

 

오늘 복음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밭 임자인 하느님께서는 울타리와 확, 탑까지 마련해 주시고, 백성들에게는 그저 소출을 맺기만 하면 되는 은총을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기대에 응답하지 않고, 그분의 종들인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마침내 아들, 곧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포도밭은 하느님의 백성이요, 울타리는 율법, 탑은 성전, 확은 제단이다.”(Commentarium in Matthaeum, XIII,3) 즉, 하느님께서는 구원 역사를 위해 이미 모든 것을 마련하셨고, 사람들에게는 그분께 순종하며 열매를 맺는 삶만을 원하셨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은혜를 잊고 자기 욕심을 따라갔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주인의 아들을 보낸 것은 인간의 기대와 달리 이미 거부와 죽음을 아시면서도 사랑 때문에 그분을 내어주신 것이라고 강조한다. “아들을 보낸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Homiliae in Matthaeum, LXVIII, 1) 곧, 십자가는 인간의 악함의 정점이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의 극치이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3)라고 하신다. 여기서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해석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유다인들에게서 다른 민족에게 옮겨졌으나, 유다인들이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은 이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그 나라에 들어간다.”(Sermo 87, 8) 즉, 하느님 나라는 혈통이나 지위가 아니라, 믿음과 순종으로 열매 맺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안에서 완전히 실현된다.”(546항)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응답을 기다리시며, 교회는 언제나 주님께 열매를 내어 드려야 한다.”(2041-2043항 참조)라고 가르친다. 

 

이 비유는 단순히 과거 이스라엘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소작인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주셨다. 성사, 말씀, 공동체, 성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문제는 우리가 소출을 내고 있는가, 곧 사랑과 순종의 열매를 맺고 있느냐다. 우리가 믿음을 잃고 자기 소유욕에만 집착한다면, 우리 역시 “나쁜 소작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에 응답할 때, 우리는 충실한 소작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소작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주님은 매일 우리 삶에 오셔서 열매를 찾으신다. 우리의 말과 행동, 기도와 봉사가 그 열매가 될 수 있다. 사순 시기인 지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기쁘게 봉헌할 수 있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_"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21,38) 

 

'믿음과 따름!' 

 

오늘 복음(마태21,33-43.45-46)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오늘 비유는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시는 비유인데, 이는 예수님과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예언자들을 배척한 그들의 악행과 악함에 대한 지적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미국과 합세해 이란과 전쟁 중에 있습니다. 지구 공동체의 공멸을 재촉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싸움의 당사자들인 유다교와 이슬람교는 아직도 구약(구약성경)에 머물러 있는 종교입니다. 신약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못한 종교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신 예수님, 곧 강생하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공생활과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메시아로 받아들였다면, 지금과 같은 싸움은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지 못한 이들, 예수님을 하느님이요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한 유다교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예언자들을 죽였고, 예언자들이 가리키고 있었던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인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가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삶의 자리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모습이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두 모습에 대한 성찰입니다. 

 

하나의 모습은 '사제들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 대리자로 부르심을 받고 사목지로 파견된 사제들이 정말로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마음(모습)으로 사목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입니다. 

 

또 하나의 모습은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직무 대리자로 파견된 사제들과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입니다. 

 

날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믿고 삶으로 잘 따라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송영진 신부님_<‘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마태 21,37-43.45-46).>

 

 

 

1)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자만심’과

 

‘특권의식’에 대한 경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들이니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자만심과 특권의식에 빠져서, 회개하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살면 구원에서 탈락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

 

<43절의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비유가 아니라 직접적인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여기서는 유대교를 향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교도 이 경고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각 개인의 경우로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다 해당됩니다.

 

신앙생활에 특권이나 특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 경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리스도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이 말씀은 분명히, 당신의 교회를 지켜 주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무조건 지켜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당신의 교회답게 잘 살면

 

지켜 주겠다는 조건부 약속입니다.

 

우리는 ‘반석’으로 임명된 베드로 사도가 바로 뒤에

 

‘걸림돌’로 추락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반석이 ‘반석답게’ 살지 않으면 ‘걸림돌’이 되어버립니다.

 

<똑같은 바위라도, 예수님의 뒤를 잘 따르면 반석이 되고,

 

예수님의 앞을 가로막고 방해하면 걸림돌이 됩니다.

 

누구든지, 또 언제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2)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의 첫 부분은(마태 21,33-36),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를 가리킵니다.

 

‘주인의 아들’에 관한 말씀은(마태 21,37-39),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을 알아보고 ‘아들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려고 아들을 죽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 상황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한다는 생각으로 죽였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2-3).”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이고, 실제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한 일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인 것은,

 

하느님을 거슬러서 ‘반역죄’를 지은 것입니다.

 

비유의 세 번째 부분은(마태 21,40-43),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겠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고집부리면 멸망을 당할 것이다.” 라는 경고입니다.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과

 

“소출을 내는 민족”은 그리스도교를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또는 유대교가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아서,

 

그 은총은 그리스도교로 넘어 왔습니다.

 

 

 

3)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아직 구원의 기회가 남아 있고,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구원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1,28-29).”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향해서는, 예수님의 교회답게 살지

 

않으면 잘릴 것이라고 경고합니다(로마 11,22).

 

교회 전체든지 개인이든지 간에

 

‘자만심’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니 항상 조심하면서 끝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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