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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6년 3월 10일 (화)사순 제3주간 화요일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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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7일 묵

188346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3-07

김건태 신부님_너는 늘 나와 함께 있다.”

루카 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는데, 그 대상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율법에 충실하다 자부하며 의인으로 자처하던 사람들입니다. 죄인들과 결코 섞일 수 없다고 믿었기에, 예수님의 행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들에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며 식탁으로, 기쁨의 식탁으로 초대하십니다.

첫째 비유는(15,3-7)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목동이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들을 기쁨으로 초대하는 비유를,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하는 단언으로 끝맺음하십니다. 양을 되찾은 목동의 기쁨에 모두 함께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둘째 비유인(15,8-10) ‘되찾은 은전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도 친구들과 이웃들이 기쁨에 초대되며,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하는 예수님의 확언을 다시금 만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비유를 담고 있는 오늘 복음 말씀은 흔히 ‘탕자(蕩子)의 비유’라 불리는 대목입니다. 앞선 두 비유와 비교해 볼 때, ‘기뻐해야 한다’ 하는 주제에서는 동일하나, 익명성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돋보이며, 그 차이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일깨우시려는 근본적인 가르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선 두 비유에서 기쁨에 초대되는 대상은 익명의 “친구들과 이웃들”이지만, 이 사람들에게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모습을 찾는 것은 아직 이릅니다. 그러나 마지막 비유에서는, 탕자의 형인 “큰아들”이 잃었던 작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에 초대되고 있습니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탕자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 비유 말씀을 묵상할 때, 회개하는 탕자와 이 아들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자비에 중점을 두는 경우가 많으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회개 자체가 아버지의 자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과, 따라서 회개는 전적으로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한편, 현실적으로 아버지를 떠나 본 적이 없다고 믿던 큰아들, 따라서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하고 자신 있게 항변하는 ‘큰아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확인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상징하는 큰아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다면, 따라서 정말 회개해야 할 점이 있다면, 떠나지 않고 충실하게 머물 수 있었음 또한 아버지의 자비에서 비롯된, 아버지의 선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는 말씀을 늘 가슴에 담고 있어야 했으나, 그러하지 못한 탓에 아우에 대한 아버지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 또한 마다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결국, 작은아들은 물론 큰아들도 회개가 필요한 존재였으며, 작은아들의 회개와 마찬가지로 큰아들의 회개에도 아버지의 자비가 절대적이었습니다. 회개와 보속의 시기인 은총의 사순시기를 살아가면서, 회개를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며, 부족한 가운데서도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 또한 아버지 자비의 덕분임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향함에서 걸림돌이 될 만한 점들이 있다면 치워버리겠다는 다짐과 아울러, 늘 회개하며 충실하게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음 또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 덕분임을 깊이 고백하고 감사드리는, 은혜로운 사십 일 가운데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되찾은 아들의 비유’, 즉 ‘탕자의 비유’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무한한지를, 이 비유를 통해 드러내신다. 작은아들의 방탕과 굶주림, 아버지의 포옹과 용서, 그리고 큰아들의 시기와 분노는 오늘 우리 모두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작은아들은 아직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유산을 요구한다. 이는 아버지를 죽은 이로 여긴 것과 같은 불효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이는 자기 고향을 버리고 이방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VII, 229) 곧, 하느님을 떠난 자는 어디서도 안식을 얻지 못하고 굶주림 속에 놓이게 된다.

 

작은아들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18절)라고 고백한다. 그때 회개가 시작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체하지 않고, 따져 묻지도 않고, 오직 입맞춤과 포옹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이다.”(Homiliae in Lucam, Hom. 2)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폭로하지 않고, 사랑으로 덮으신다. 하느님의 용서는 책망보다 먼저 다가오는 자비의 포옹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세 가지 선물을 준다. 가장 좋은 옷은 세례로 입혀진 의로움의 옷, 반지는 아들의 신분 회복, 신발은 자유인의 삶을 상징한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는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 곧 성찬례의 은총을 가리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해석한다. “살진 송아지는 그리스도이시니, 우리가 영적 잔치를 즐기도록 그분이 희생되셨다.”(Sermo 112, 2) 회개는 단순한 도덕적 변화가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여정이며, 교회의 성사 생활 안에서 새로운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큰아들은 매일 아버지와 함께 있었음에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 집을 의무의 장소로 살았지, 잔치의 기쁨으로 살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 자체가 기쁨의 잔치인 것을 알지 못하고 아들이 아닌 종첢 의무감에서 설았다. 성 그레고리오는 큰아들을 이렇게 해석한다. “그는 시기한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이 아니라, 종처럼 두려움으로만 섬겼기 때문이다.”(Homiliae in Evangelia, 34,9) 곧, 하느님과 늘 함께 있으면서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종과 같은 마음으로 머물 수 있다.

이 비유는 우리의 삶을 잘 비추어 준다. 아버지를 떠나 방탕에 빠진 작은아들의 모습, 회개와 용서의 은총을 경험하는 되찾은 아들의 모습, 시기와 닫힌 마음을 드러낸 큰아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모습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버지의 끝없는 기다림과 먼저 달려오시는 자비다. 사순 시기, 우리 모두 작은아들처럼 겸손히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아버지의 집, 잔치로 돌아가자. 그곳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미 준비하신 살진 송아지, 곧 그리스도의 성체성사를 통해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자.

 

이병우 신부님_제목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3.7)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15,32)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의 신자이며 사제요 수도자인가?'

 

오늘 복음(루카15,1-3.11-32)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불만'과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이렇게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15,3)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복음 중에 복음'이라고 불리는 비유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분명한 이유를 드러내고 있고, 허물이 많은 우리들이고, 그런 우리들에게 필요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15,23-24ㄱ)

 

이는 집나간 아들, 죄인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아버지가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 아버지이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돌아온 작은 아들과 동생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모습을 보고 투덜거리는 큰 아들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나는 어떤 모습인가?'라는 질문 안에 머물러 봅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인가?

아니면 회개하는 작은 아들의 모습인가?

너에게 베풀어지는 은총 앞에서 투덜거리는 큰 아들의 모습인가?

 

세 모습이 우리 안에 항상 공존하고 있지만, 그래도 하느님의 자비가 되고, 하느님의 자비로 돌아가는 탕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15,21)

 

이병우 루카 신부

 

송영진 신부님_<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25-32)”

 

 

 

1)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회개하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여라.” 라고 ‘모든 사람’을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작은아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권고이고, ‘큰아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라는 권고입니다.

 

‘작은아들’은 세리들 같은 죄인들,

 

또는 죄인이라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이고,

 

‘큰아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또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인데,

 

처음부터 ‘작은아들’과 ‘큰아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상황에 따라서 ‘작은아들’이 되기도 하고,

 

‘큰아들’이 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모습을

 

동시에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의의 심판’을 내려 달라고

 

간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합해서 생각하면, ‘작은아들’은 ‘회개한

 

죄인’이고, ‘큰아들’은 ‘회개해야 할 죄인’입니다.

 

 

 

2) 하느님은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지만,

 

그 ‘기다림’은 ‘무한정’이 아닙니다.

 

‘심판의 날’은 하느님의 기다림이 끝나는 날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날’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언제까지 기다려 주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4-36).”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는 작은아들이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다가 정신을 차린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루카 15,14-17), 만일에 돈이 아주 많아서

 

늙어 죽을 때까지 곤궁에 허덕이는 일이 없었다면?

 

인간 세상의 실제 현실을 보면, 그렇게 살다가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불효를 깨닫고

 

뉘우치는 것처럼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금 회개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아니더라도,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때서야 뒤늦게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3) 뉴스를 보면서, “하느님께서는 왜 저런 악인들을 내버려

 

두시는가? 자비도 필요하겠지만, 때로는 ‘정의의 심판’이

 

더 필요할 때가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큰아들’이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회개한 죄인을 용서하더라도,

 

죄에 대해서는 합당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생각.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너 자신이 지은 죄부터

 

회개하여라.” 라고 말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중간쯤에 있는 사람이라면?

 

또는 어떤 끔찍한 사건의 실제 피해자라면?

 

나의 ‘큰 상처’와 ‘원한’은 그대로 남아 있고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어서, 하느님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는데, 가해자는 회개했다고 해서

 

용서받고 하느님의 잔치에 참석해서

 

잔치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런 상황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이해하는 것은,

 

또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단,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고 해서

 

‘정의의 심판’을 소홀히 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에 스테파노 순교자가 순교 때에 박해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지 않고 ‘정의의 심판’을 청했다면?

 

그리고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바오로 사도를 만났을 때,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인정하지 않고

 

형제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면?

 

<그런데 스테파노 순교자는 박해자들이 회개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바오로 사도를 만났을 때,

 

분명히 크게 기뻐하면서 반가워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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