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9일 묵상부님_3월 9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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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93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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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배척받는 예언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갈릴래아를 시작으로 복음 전파를 시작하시다가,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 고향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하는 반응이 뒤따르는 것을 보니, 그 말씀이 동네 사람들을 무척이나 불편하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첫 말씀이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는 말씀이었으니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경전으로 인정하는 구약성경은 46권이며, 그 가운데 예언서가 1/3을 차지하고 있으니, 분량은 물론 중요성에서도 뒤지지 않는 작품입니다. 성경의 예언자는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중심으로 하느님의 개입이 필요했던 때와 장소에 그분의 말씀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필요에 따라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현재를 위한 시도였습니다. 하느님의 개입이 필요했던 때와 장소 또는 대상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이 펼쳐졌던 때와 장소,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기원전 8세기에 활동했던 예언자 아모스가 정의를 주제로 말씀을 전했던 것은 그 시대와 장소가 정의가 아니라 불의로 범벅이 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자가 힘주어 전하는 말씀의 주제를 보면, 그 시대와 장소가 어떠한 문제를 알고 있었는지 쉽게 파악이 됩니다.
이처럼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장에서, 하느님을 대변하여 시대와 장소의 문제를 직시하고 소리를 높이니, 청중 대다수는 귀를 막고자 했고, 반대의 기세를 높이려 했습니다. 그러니 예언자는 늘 소외되고 반대의 표적이 되는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그것도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 지역에서 펼쳐진 일이었습니다. 엘리야와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1열왕 17장) 엘리사와 시리아 군사령관 나아만에게 관한 이야기입니다(2열왕 5장). 이 두 이방인은 예언자들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구원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역사적 예를 통해서 우리는, 결국 예언자들이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 곧 하느님 말씀의 내용 때문이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회개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을 밟으라는 경계 또는 경고의 말씀을 마다하고, 그 잘못된 길을 고집하려는 의지가 예언자들을 밀어내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벼랑 끝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더라도, 세례성사를 통해 당신 자녀로 삼으신 가톨릭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백성 됨 또는 자녀 됨이 특권이라면, 오히려 하느님 말씀 청취와 실천에 모범적으로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이며 회개로 비뚤어진 신앙 자세를 바로잡는 가운데, 믿는 대로 행동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가꾸어나가는, 귀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거부당하신 장면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당신이 자란 곳에서 말씀을 선포하시지만,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 이 말씀은 예수님만의 체험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모든 이가 겪는 보편적 운명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라며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간적인 선입견과 편견이 그들의 눈과 귀를 가렸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고향에서 멸시받은 것은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판단이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았다.”(Homiliae in Matthaeum, 48, 2) 우리도 주님을 너무 익숙한 분으로만 여기면, 그분을 거부할 수 있다.
예수님은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인 나아만을 예로 드신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은총이 흘러간 것은, 그들이 믿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혈통이 아니라, 믿음이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든다.”(Adversus Haereses, IV,21,1) 곧, 하느님의 은총은 민족적 경계에 묶이지 않고, 믿음으로 열린 이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분노하여 그분을 벼랑으로 밀어내려 한다. 불편한 진리를 외면하고, 자기 틀에 맞지 않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모습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사랑하기를 원치 않는 이들에게는 미움을 낳는다.”(Enarrationes in Psalmos, 58, 2) 주님은 우리 안에 자리한 완고함, 선입견, 자기중심적 생각을 드러내신다. 그것이 때로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변화와 회개의 길이 열린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회개와 변화를 끊임없이 촉구하였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들은 거부를 당하였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심으로써, 예언자들의 길을 따르셨다.”(2581항 참조) 교회 역시 세상 안에서 불편한 목소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이다. 복음은 우리 마음의 닫힌 문을 비추어 준다. 혹시 우리도 나자렛 고향 사람들처럼 익숙함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혹은 불편한 말씀을 듣고 나자렛 사람들처럼 거부하려 하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주님은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사순 시기, 우리는 편견과 고집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불편한 진리에도 마음을 열어야 한다. 우리도 나아만 장군이나 사렙타 과부처럼 믿음으로 구원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_<사순 제3주간 월요일>(3.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4,24)
'믿음과 삶으로부터 오는 구원!'
오늘 복음(루카4,24ㄴ-30)은 '고향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완고함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셨음에 대한 선포입니다. 이 기쁜 소식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에게 선포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 그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4,24)
이어서 엘리야 때에 많은 과부들 중에서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된 이야기와 옐리사 예언자 시대에 많은 나병 환자들 중에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진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난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예수님께서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시는 말씀이 전해집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간절하게 고대하고 있었던 유다인들과 하느님의 법인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 사람들이 구세주요 메시아이신 예수님,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지금 여기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세례가 구원의 절대적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의 합당한 삶이 있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구원의 문은 참되게 믿는 이들,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된 이들에게 항상 열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한 메시아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24-30).”
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온 세상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라는 ‘복음 선포’이기도 하고,
당신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메시아’ 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이스라엘만 구원을
받고,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만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즉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모든 민족’의 구원이 당신의 뜻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1-3).”
이 말씀에서 ‘세상의 모든 종족들’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야곱도 죽기 전에 아들들을 축복할 때
‘모든 민족’의 구원을 말했습니다.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
이 말은, 유다의 후손 가운데에서 ‘모든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모세도 죽기 전에 ‘모든 민족’의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말을 했습니다.
“정녕 민족들을 사랑하시는 분. 당신의 거룩한 이들은 모두
당신 손안에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 발 앞에 엎드려
저마다 당신의 말씀을 받습니다(신명 33,3).”
이렇게 ‘모든 민족’의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잊어버리고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2) 구약시대는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했던
시대였고, 신약시대는 ‘신앙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할 때에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 말은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섬기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보편성’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13)”
<여기서 ‘그리스인’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뜻합니다.>
3) 구원에는 어떤 차별도 없고, 특권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믿기를 거부하면 못 받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는다면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 일은 없는 것처럼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4.26).
[출처] 사순 제3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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