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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6년 3월 11일 (수)사순 제3주간 수요일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가톨릭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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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_조욱현 신부_이병우 신부_송영진 신부_3월 10일 묵상

188414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3-10

김건태 신부님_용서는 해야 하는 것

 

 

오늘은 하늘 나라의 열쇠’, 다시 말해서 지상에서 맺고 푸는 권한을 부여받은 베드로가 입을 엽니다: “주님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물론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선택된 이래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직접 듣고 보아 배운 덕에최소한 용서는 해야 하는 것임을 잘 인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다만 용서의 정도 또는 한계가 궁금하여 여쭙니다특히 떠나려는 형제를 공동체로 다시 불러들이는 일곧 형제를 얻는 일은 예수님의 가르침 이전에 교회공동체가 솔선수범해야 할 중대한 직무였기에, ‘형제를 얻는 일에 관한 교회의 공적인 직무를 맡게 될 베드로로서 궁금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베드로는 충만을 상징하는 일곱이라는 숫자를 제안하지만예수님은 충만의 충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일흔일곱이라는 숫자로 답하십니다그러니까 용서에는 한계가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형제를 얻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그 유명한그러나 마태오 복음에만 나오는, ‘종의 비유 이야기가 소개됩니다10,000 탈렌트 (100 데나리온고대의 화폐 단위를 보면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탈렌트는 그리스의 화폐 단위로서 1탈렌트는 6,000드라크마인데, 1드라크마는 로마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1데나리온으로서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부연하면예수님 당시에는 서로 다른 세 나라의 화폐가 사용되었습니다. (데나리온콰드란스 등로마의 화폐는 일반적으로 세금을 낼 때, (렙톤드라크마미나스타테르탈렌트 등그리스의 화폐는 상거래 때그리고 유다 화폐 세켈은 십일조나 헌금 등 종교와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다시 한번 환전상이 필요했던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10,000 탈렌트/100 데나리온은 60,000,000(164품삯/100일 품삯으로 대조됩니다비교가 불가한 대조입니다하느님의 무한한 용서 덕분에 살고 있음에도형제를 용서하는 데 인색한 우리의 속 좁은 인생을 개탄하고자예수님은 다소 과장된 수적 대비법을 인용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하느님은 늘 우리에게 자비로우신 분으로 머무시기를 바라면서정작 이웃에게 너그럽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러기에 또한하루에도 여러 번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하는 주님의 기도를 올리면서 죄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용서라는 화두를 마음에 새기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좀 더 너그러운 모습으로 다가설 수 있는귀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형제가 제게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21절)라고 묻는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라고 대답하신다. 이는 단순한 수학적 계산이 아니라, 용서의 무한성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 또한 서로를 끝없이 용서해야 함을 가르치신다. 주인의 빚 탕감 이야기는 바로 이 무상의 은총과 그에 합당한 삶의 태도를 보여 준다.

 

초대 교부들은 이 복음을 깊이 묵상하며, 용서가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직결된다고 강조하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용서하셨는데, 너는 동료를 용서하지 않겠느냐? 자비를 입은 자가 잔혹한 자로 드러나는구나.”(Homilia LXI in Matthaeum) 성 치프리아노는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강론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하지만, 우리가 먼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용서는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다.”(De Oratione Dominica, 23) 성 아우구스티노는 형제를 용서하는 마음을 잃은 자는 결코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네가 용서하지 않는 한, 네 죄도 남아 있다. 왜냐하면, 너에게도 용서되지 않기 때문이다.”(Sermo 114) 이 교부들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준다. 곧,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구원에 필수적인 길이라는 것이다.

 

교회도 이 진리를 반복하여 가르쳐 왔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이 형제를 사랑하도록 기꺼이 열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마음속에 들어올 수 없다.”(2840) 또한 “용서는 제자들의 공동체 생활의 근본 조건이다. … 그것은 성령의 불타는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가장 높이 오르는 산봉우리이다.”(2845항) 즉, 용서는 단순한 인간적 덕행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에 뿌리박힌 신적 행위라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거울과 같다. 나는 정말로 내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가? 아니면, 용서받은 은총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붙잡고 있지는 않은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곧 나를 지옥 같은 감옥에 가두는 행위이다. 반대로 용서는 나와 상대방 모두를 해방시키며, 하느님의 자비를 온전히 체험하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일만 탈렌트의 빚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그 은총을 입은 우리가 백 데나리온에 불과한 형제의 잘못을 붙잡고 있다면, 주님의 가르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이 될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35절)


이병우 신부님_제목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3.10)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18,35)


'구원의 절대적 조건이자 대전제인 용서!'


오늘 복음(마태18,21-35)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는 말씀과 '매정한 종의 비유'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그리고 이어서 '만 탈렌트(6조원)'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1천만원)'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이제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이신 예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 요즘 우리가 보내고 있는 '사순시기'는 '이제와 영원한 구원(부활)에 이르는 길을 깊이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을 가리키고 있고, 그 부활을 향해 있습니다. 이는 '내가 죽어야 부활할 수 있다는 신비'입니다.


그 죽음의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용서'입니다. '조건 없는 용서'입니다. '일곱 번과 일흔일곱 번의 용서'는 '조건 없는 용서에 대한 표현'입니다. 내가 이렇게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하는 근본 이유는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영원히 살기 위해서'입니다.


'용서는 구원의 절대적 조건이자 대전제'입니다.


내가 먼저 많은 죄를 탕감받았으니, 나도 너의 잘못을 탕감해 줍시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18,33)


송영진 신부님-<‘용서’의 목적은 ‘선의 회복’입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2-35).”

1) 성경에서 ‘일곱’은 하느님을 나타낼 때, 또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완전수’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질문은, “제가 죄를 지으면

하느님께서는 저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실까요?

일곱 번까지는 용서해 주시겠지요? 그러면 저도 형제를

용서하는 일을, 하느님처럼 일곱 번까지는 해야 하겠지요?”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하느님의 용서는 ‘무한정’이다. 그러니

너도 하느님처럼 무한정 용서해야 한다.”입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조금 다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ㄴ-4).”

무한정 용서해 주라는 가르침은 같은데,

‘회개하거든’이라는 말이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마태오복음은 “회개시키기 위해서 용서해야 한다.”이고,

루카복음은 “회개했으니까 용서해야 한다.”입니다.

두 가르침을 합해서 생각하면,

용서는 ‘내가’ 할 일이고, 회개는 ‘그가’ 할 일입니다.

내가 그를 용서하는 일은, 그의 회개 여부와는

상관없이 내가 실행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나의 입장을 반대로 바꿔서, 나의 회개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가 ‘이미’ 나를 용서했다면?

내가 회개하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면, 그에게 용서를 청하기 위해서 회개합니다.>

용서받았으니까 회개하든지, 용서를 청하려고

회개하든지 간에, 어떻든 회개는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모든 인간은, 형제를 용서하는 일과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을 동시에 실행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나는 용서를 청할 일을 한 적이 없다.” 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성모님 외에는, 또 갓난아기들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2) ‘매정한 종의 비유’에서, 33절의 주인의 말은, “네가

용서받았으니 너도 동료를 용서해야 한다.”이고, 35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너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인데,

표현으로는 ‘다른 말’이지만, 뜻으로는 ‘같은 말’입니다.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은 ‘이미’ 나에게 주어져 있고,

내가 형제를 용서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이 나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3) 예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춰서, ‘매정한 종의 비유’의

이야기 순서를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동료를 감옥에 가두는 일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주인에게 가서 간청한 것으로......

그러면 주인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너는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면서도 어찌 감히

나에게 와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느냐?”

하느님께 용서와 자비를 간청하려면,

먼저 이웃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4) 그런데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용서를 말하기가 몹시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다윗과 밧 세바와 밧 세바의 남편 우리야’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2사무 11장).

‘우리야’의 입장에서는 목숨 바쳐 충성했던 임금에게

배신당하고, 아내를 빼앗기고, 살해당했으니, 정말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인데, 그런 ‘우리야’에게 가서

다윗을 용서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야’가 다윗을

용서하지 못해도,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와 ‘나봇’의 이야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1열왕 21장).

정말로 억울하게 살해당하고 재산을 빼앗긴 ‘나봇’에게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를 용서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에도 힘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용서를 말하기 전에,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 주는 일을 먼저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인은 용서를 말해야 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라고 말합니다(로마 12,19-21).

용서의 목적은 ‘선의 회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 꾸짖어야 할

때도 있고, 국가의 사법제도에 넘겨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힘없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원통하고 억울해서

피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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