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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6년 3월 10일 (화)사순 제3주간 화요일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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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신부님_ 어떤 방법을 쓰면 내 입에서 비난이나 험담이 나가지 않을 수 있을까?

188417 최원석 [wsjesus] 스크랩 09:5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 제3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매정한 종의 비유』입니다. 1만 탈렌트라는 우주적인 액수를 탕감받고도 고작 100데나리온 때문에 동료의 멱살을 잡고 감옥에 가둔 종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종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나쁠 수 있을까?"라고 혀를 찹니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단순히 인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라는 자비의 생태계에 적응하지 못한 영적 부적응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비난의 유혹에서 벗어나 하느님 나라의 시민권을 지킬 수 있을지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어떤 공동체든 그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자비의 농도가 있습니다. 이를 자비의 임계점이라고 부릅니다. 가정은 아주 많이 자비로워야 유지되는 곳이고, 하느님 나라는 자비 자체가 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자비가 산소처럼 흐르는 나라에서 누군가를 비난하고 용서하지 않는 것은, 공동체 전체에 독가스를 뿌리는 행위와 같습니다. 임금이 그 종의 용서를 취소하고 형리에게 넘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잔인한 복수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방역입니다. 자비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무자비라는 바이러스가 온 나라에 퍼져 다른 백성들의 행복까지 갉아먹지 않도록, 확진자를 격리하는 조치입니다. 내가 타인의 잘못을 끄집어내어 떠들고 용서하지 못할 때, 사실 나는 하느님의 방역 당국에 "저는 자비의 나라에 살 자격이 없는 감염자입니다"라고 스스로 신고하고 있는 셈입니다. 유럽 수도 생활의 기틀을 세운 성 베네딕토는 그의 『수도 규칙』 제28장에서 이 방역의 원리를 아주 안타까운 심정으로 설명합니다. 수도원에서 끝내 회개하지 않고 형제들을 비난하며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형제가 있을 때, 원장은 현명한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원장은 먼저 온갖 정성을 다해 그를 훈계하고 기도하며, 몰래 지혜로운 형제들을 보내 그를 위로하고 자비로 감싸 안습니다. 하지만 그 형제가 끝까지 자신의 무자비함을 고집하며 공동체에 독을 퍼뜨린다면, 베네딕토 성인은 원장에게 눈물을 머금고 수술 칼을 들라고 명합니다. "한 마리의 병든 양이 온 양 떼를 전염시키지 않도록 그를 잘라내야 한다." 이것은 그 형제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남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살리기 위한 목자의 어쩔 수 없는 결단입니다. 그렇다면 그 종은 왜 1만 탈렌트의 자비를 입고도 100데나리온에 눈이 멀었을까요? 우리는 살면서 타인의 허물이 보일 때마다 영적 센서에 빨간불이 들어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아, 내가 지금 20조 원의 탕감 영수증을 찢으려 하는구나!' 이 기억이 희미해질 때 우리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타인의 멱살을 잡게 됩니다. 알아도 기억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실제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1994년 르완다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대학살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당시 르완다는 국민의 90% 이상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100일 만에 8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웃의 손에 죽었습니다. 어제까지 성당에서 나란히 앉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평화의 인사를 나누던 이들이,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의 멱살을 잡고 칼을 휘두른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배웠고 분명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내 이웃이 하느님이 탕감해주신 소중한 형제라는 기억보다 당장의 정치적 선동과 증오라는 욕망에 굴복했습니다. 자비의 임계점을 스스로 무너뜨린 그들은 결국 그토록 평화로웠던 공동체를 지옥으로 만들었고, 스스로 하느님 나라의 시민권을 불태워버렸습니다. 기억하려는 의지를 놓아버릴 때, 인간은 얼마나 잔혹한 방역 대상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실화입니다. 결국 신앙의 핵심은 ‘기억’입니다. 비난의 유혹이 폭풍처럼 몰아칠 때, 우리 영혼을 잡아줄 기억의 장치들이 필요합니다. 성인들은 감정이 폭발하려는 찰나, 주님의 자비를 강제로 떠올리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장치들을 가동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가슴의 십자가입니다. 그는 본래 불같은 성격을 타고났습니다. 비난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할 때마다 그는 옷 속에 품은 날카로운 금속 십자가를 손으로 꽉 쥐었습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가슴에 피가 배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 통증을 통해 그는 강제로 기억을 소환했습니다. '예수님이 20조 원을 들여 살려낸 이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다. 내가 저 멱살을 잡으면 나를 살리신 저 십자가의 주님이 다시 피를 흘리신다!' 피를 흘리는 육체적 고통을 써서라도 주님의 자비를 기억해내려는 처절한 의지였습니다. 모든 성인이 이와 같은 방법을 썼습니다. 성녀 파우스티나의 예수님의 가면 기법입니다. 상대를 비난하려는 마음이 들 때, 상대의 얼굴 위에 겹쳐진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얼굴을 상상하려 노력했습니다. 성 베네딕토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라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험담을 시작할 때, 바로 내 옆에서 그 이야기를 슬픈 표정으로 듣고 계시는 예수님의 반응을 상상했습니다. 모두가 이런 식입니다. 한 번에 되는 것은 없습니다. 습관이 덕이 되고 덕이 본성이 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경고했습니다. 하느님께 1만 탈렌트의 자비를 입은 우리가 형제의 100데나리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을 임금이 아니라 가장 엄격한 채권자로 변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을 비난하고 싶을 때, 그것은 내 영혼의 산소가 떨어졌다는 신호입니다. 그때마다 멈추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자신이 세워 놓은 방법을. 가장 좋은 것은 그 이후에 보게 될 심판관이신 예수님 얼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의 얼굴을 기억하려는 피 흘리는 의지가 우리를 하느님 나라의 가장 행복한 상속자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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