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게시판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자) 2026년 3월 16일 (월)사순 제4주간 월요일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가톨릭마당

sub_menu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13일 묵상

188472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3-13

김건태 신부님_첫째가는 계명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유일한 순간을 확인합니다. 예수님과 율법 학자가 상호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서로를 인정하는 복음서의 예외적인 현장을 목격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율법 학자는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여쭙니다. 이 질문 속에는 ‘지켜야 할 그 많은 계명’이 전제됩니다. 율법 연구와 가르침을 전문으로 하던 율법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아리송하다는 의중이 보입니다. 사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시 말해서 사람의 삶이 바뀌어나감에 따라, 그에 대응하기 위한 법 제정이 증대되거나 난발되어 어느 법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 난감했을 것입니다. (구전 율법을 정리해 놓은) ‘미쉬나’에 실린 안식일에 지켜야 하는 법규만 하더라도 39가지이며, 세부 규정으로 들어가면 엄청납니다. 바느질, 실 제조와 풀기, 매듭 매기와 풀기와 같은 행위까지 금지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율법 학자의 질문은,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그러하듯,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진정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 던진 질문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신명기의 핵심 가르침이라 말할 수 있고, 유다인들이 성구갑에 늘 넣어 지니고 다니던 성경 구절인 신명기 6장 4-5절로 대답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이어져, 율법 학자가 묻지도 않은 둘째 계명으로 넘어갑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어서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하고 서명 날인하십니다. 율법 학자도 이 응답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는 사실도 예외로 보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묵상해 보면, 율법 학자는 바로 이 ‘둘째 계명’의 중요성에 관한 말씀을 듣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느님 사랑 이외에, 오경의 약자 보호법이나 소외 계층에 대한 예언자들의 지대한 관심 등에서 이웃 사랑은 부정할 수 없는 가르침으로 제시되어 있으나, 구약성경에 명시적으로 꼭 한 번 언급되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는 문구 인용은 그래서 의미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응답과 율법 학자의 화답 속에서 우리는 이미 하느님 사랑이 바로 이웃 사랑이라는 순리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 사랑에 이를 수 있다는 위대한 가르침이며, 이것이 바로 가장 큰 계명임을 터득합니다.

 

사순시기는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사랑으로 가르치셨고, 사랑으로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쫓으며, 신앙인의 삶을 다시금 정리하는 가운데, 그 사랑의 힘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거룩한 시기입니다.

 

오늘 하루, 만나는 모든 사람, 특히 여러 가지 사정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웃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 뵙는 행복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은” 하루가 될 것입니다!

 

조욱현 신부님_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하라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묻는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주저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 신앙 고백인 쉐마 이스라엘을 인용하신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29-30절; 신명 6,4 참조). 그리고 곧바로 두 번째 계명을 덧붙이신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1절; 레위 19,18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의 계명으로 선포하신다. 하느님 사랑이 진실하다면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고, 이웃 사랑이 참되려면 하느님 안에서만 온전해질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In Epistolam Ioannis ad Parthos Tractatus VII, 8) 즉, 사랑이야말로 모든 율법의 완성이며, 사랑 안에 있는 자는 절대 잘못하지 않는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야말로 모든 계명의 핵심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멸시한다면, 그 사랑은 거짓이다.”(Homiliae in Epistolam I Ioannis, Hom. 5) 이는 요한 사도의 말씀을 그대로 해석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성 그레고리오도 말한다. “사랑은 선행을 낳고, 선행은 사랑을 자라게 한다.”(Moralia in Iob, lib. X, c. 6) 즉,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라는 열매로 드러나며, 이웃 사랑을 통해 우리는 더욱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간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의 계명으로 묶어 주셨다. 이 두 계명은 서로를 해석해 준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확증하며,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원천이다.”(2067항) 또한 “사랑은 모든 덕의 형상이며, 계명의 유대이며, 성덕의 완성이다.”(1827항)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 특히 사순절의 여정은 바로 이 사랑을 실천하는 데 달려 있다. 단식과 기도, 자선은 모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라고 하신다. 그는 계명의 핵심을 이해했지만, 아직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지는 못했다. 우리도 신앙을 머리로만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삶으로 증거해야 한다. 사랑은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에서 드러난다. 굶주린 이웃에게 빵을 나누어 주고, 외로운 이에게 다가가며,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점점 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_제목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3.13)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12,28)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가자!'

 

오늘 복음(마르12,28ㄱㄷ-34)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모든 계명을 잘 지키고 있고,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ㄴ)고 칭찬 받은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12,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6,4-5)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19,18) 이 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29-31)

 

율법 학자가 '가장 큰', 곧 최상급(the most)의 계명 하나가 무엇인지를 예수님께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나가 아닌 '두 계명',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분리 되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가르침에 핵심이며, 분리된 사랑이 곧 '위선'이고, 예수님께서는 이 '위선 사랑'에 대해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마태23,1-36)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고, 너의 힘듦이 나의 힘듦이 되는 것, 저는 이것이 '이웃 사랑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인 측은지심'이며, 이 결정적 표지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호세14,2)

 

돌아갑시다!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갑시다!

이것이 바로 '사순시기의 본질'입니다.

 

송영진 신부님_<‘가장 큰 계명’은 ‘신앙생활의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마르 12,28ㄱㄷ-34).>

 

 

 

1)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가장 큰 계명’은 신앙생활의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에서

 

‘사랑’이라는 말에는 ‘믿음’과 ‘희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만 믿어야 한다.”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만 희망해야 한다.”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해야 합니다.

 

동전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가

 

좋은 모범이 됩니다(마르 12,43-44).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2)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너무나도 크고, 넓고, 높고, 깊은 ‘덕’이어서,

 

단순하게 한마디 말로 정의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사랑이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 바치는 것”, 또는

 

“사랑이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 바치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은 사랑하는 방법인데,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곧 사랑이기도 합니다.>

 

 

 

3) 구약성경 아가서를 보면,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라는 말이 있습니다(아가 8,6).

 

죽음처럼 강하다는 말은,

 

‘생명의 의지’처럼 강하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살고 싶어 하는 의지처럼 강하다는 것입니다.>

 

“왜 사랑하는가?” “살고 싶어서...”

 

“하느님을 왜 사랑하는가?”

 

“살고 싶어서.”, 즉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서.”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믿는

 

이유와 같습니다.

 

“하느님을 왜 믿는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니까.”

 

그래서 ‘사랑’과 ‘믿음’은 하나이고, ‘희망’에 연결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4) 모든 것을 다 바친다는 말은,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에 연결됩니다(마태 13,44-46).

 

두 비유에 있는 “가진 것을 다 팔아” 라는 말과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라는 말은, 하늘나라는 가진 것을 모두

 

바쳐야만 얻을 수 있는 귀한 보물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 보물을 얻는 것 하나만 중요하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버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라는

 

말씀의 ‘자신을 버리고’에 연결됩니다.>

 

 

 

5)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3,16.18; 4,19.21).”

 

주님께서는 먼저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 실천’이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삶으로) 실행하는 것 없이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 73 0

추천  2 반대  0 신고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