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14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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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90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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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오늘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나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하나는 세리였다.”
‘분리된 자’를 의미하는 바리사이파는 사두가이파와 에쎄네파와 함께 당시 유다교의 영향력 있던 종교조직으로서, 예수님 시대에 약 6,0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율법 제일주의자로서 철저한 율법 준수를 통해서만이 하느님의 의로움, 곧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율법 준수에 성실하지 못한 자들, 예를 들어 세리들과 죄인들을 ‘무법자’로 여겨 업신여기거나 상종을 일체 거부했으며, 나아가 의로움, 곧 구원 영역에서 하느님께 자기 권리를 내세울 수 있다고 확신하던 사람들입니다.
한편, 세리들은 하나의 세무직에 종사하던 사람들로서, 복음에서는 늘 죄인들과 함께 언급됩니다. 하나의 직업으로서 그 직무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었겠지만, 로마제국의 치하라는 정치적 상황에서, 모든 세금이 로마제국으로 흘러 들어갔기에, 세리라는 직업 자체가 유다인들의 눈에 좋게 보일 리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착복이나 횡령 등으로 어느 직업보다도 비리의 위험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이 같은 목적으로 성전에 올라갑니다. 우리는 ‘의롭다고 자처하던 사람’의 기도와 ‘가슴을 치며 자비를 청하는 사람’, 이 두 사람의 기도 내용과 모습 속에서 그들의 속마음과 신앙 현실을 그대로 직시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바리사이의 기도 안에는 하느님이 자리하실 공간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부재’가 목격됩니다. 기도는 부족한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올리는 행위, 따라서 하느님 중심이어야 하는데,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입니다. 사실 종교적인 잣대로 본다면, 이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율법을 완벽하게 준수한 인물로 평가되나,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필요성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바리사이의 기도 속에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는 표현이 담겨 있기는 하나, 이 역시 하느님 없이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확신하는 신념의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이와는 달리, 세리의 기도는 오로지 하느님 중심적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시 말해서 잘못을 일일이 열거하여 용서를 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간청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 위대한 신앙인의 고백이며, 늘 가슴에 담고 살아가야 할 고백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의로움을 청한 적이 없었던 반면, 세리는 그것이 기도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신앙인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면 이조차 전적으로 하느님의 도우심 덕분임을 온 마음으로 감사드리고, 아직 부족함이 태산이라면 자비하신 하느님께 자비와 도움을 청하며, 은총의 이 사순시기를 더욱 힘내 달려가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의 기도를 대조하신다. 바리사이는 성전 안에서 서서 자기의 선행을 나열하며,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한다. 반면 세리는 감히 눈을 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3절)라고 기도한다. 예수님의 결론은 분명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4절)
바리사이의 기도는 하느님께 드려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향한 말이었다. 그는 단식과 십일조라는 율법적 행위를 통해 자랑을 늘어놓으며 다른 사람을 비난했다. 오리게네스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한다. “바리사이는 감사한다고 말하지만, 그의 기도 속에는 감사가 없고, 오히려 교만과 자만이 가득 차 있다.”(Homiliae in Lucam, Hom. 39) 그의 기도는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고, 자신을 드높이려는 것이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눈조차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세리는 자기 죄를 드러냈고, 하느님은 그를 용서하셨다. 그는 자신을 낮추었기에, 하느님께서 그를 들어 올리셨다.”(Enarrationes in Psalmos, Ps. 85, 7) 겸손한 고백은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또한 강조한다. “하느님은 겸손한 이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 왜냐하면, 겸손은 모든 덕의 뿌리이기 때문이다.”(Homiliae in Matthaeum, Hom. 15,3) 교리서도 겸손을 이렇게 정의한다. “겸손은 피조물이 자기 자신을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인정하는 것이다.”(2559항) 또한 “회개하는 자의 기도는 겸손한 신뢰와 함께 이뤄져야 한다. 겸손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열쇠이다.”(2631항) 따라서, 참된 기도는 자기 과시가 아니라, 죄를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 있다.
사순절은 단식, 기도, 자선을 실천하는 때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교만과 자랑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외적인 행위보다 마음의 겸손을 원하신다. 바리사이는 자신의 선행을 드높였지만, 하느님께 닿지 못했고, 세리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기에 의롭게 되었다. 결국 “내가 남들보다 나은가?”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가 신앙의 핵심 질문이다. 우리도 세리와 같은 겸손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3절) 이 기도가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고,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어 준다. 이 사순절 동안 우리가 교만을 버리고, 겸손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며, 참된 의로움 안에서 살아가길 청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_"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8,14ㄴ)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겸손하자!'
오늘 복음(루카18,9-14)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바리사이와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18,11-12)
그러나 바리사이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18,13ㄴ)
이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8,14)
개인적으로 참 마음 뜨겁게 다가오는 복음이 있는데, 바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와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를 대할 때마다 기쁨과 희망이 솟습니다.
아마도 제게 부족함이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 두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의 큰 사랑이 전해지고 있고, 이 완전하고도 큰 사랑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신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극진한 사랑을 늘 기억합시다!
그리고 이 큰 사랑 앞에서 늘 겸손합시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6,6)
송영진 신분님_<위선자들의 기도는 ‘거짓 기도’이고,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9-14)>
1)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는 산상설교의 ‘올바른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비유로 풀이해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5-6).”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이기
때문에(9절) ‘교만한 위선자’입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이고,
‘기도하는 척 하는 연기’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그의 말이 거짓말로 보이지 않지만,
위선자의 기도이기 때문에 그의 기도 자체가
‘거짓 기도’이고, ‘거짓말’입니다.
또 겉으로는 강도짓과 불의와 간음을 저지르지 않는,
즉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의 속마음에
탐욕과 음욕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마태 5,28),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자신의 신심을 과시하기 위한 일, 즉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마태 6,16),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의 단식과 십일조는
아무것도 아닌 일, 즉 ‘헛일’입니다.
<‘헛일’은 하면 할수록 죄만 쌓이는 일입니다.
위선자들의 단식과 십일조는
하면 할수록 죄를 더욱 키우는 일이 될 뿐입니다.>
2) 바리사이의 기도에서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라는
말은, “저 세리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다.” 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죄이고, 자기는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죄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1-5).”
3) 11절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는,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말이 아니라, 겸손한 척 하는 ‘빈말’입니다.
14절의 ‘의롭게 되다.’는 ‘구원을 받다.’입니다.
바리사이의 경우는 위선과 교만을 버리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지만, 끝까지 위선과
교만을 버리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세리의 경우, 진실하게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받게 되었는데,
현재 시점에서는 ‘구원의 시작’일 뿐이고,
끝까지 충실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한 번 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해야 하는 일입니다.
4)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는, “누구든지
교만한 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는, “하느님 나라는
겸손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다.”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아무도 “나는 의롭다. 나는 구원받는다.” 라고
큰소리칠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일이고,
구원받을 자격을 잃는 일입니다.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자기 입으로 “나는 의인이다.
나는 성인이다.” 라고 말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인 성녀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회개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가리켜서 ‘구원받지 못할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자기 자신은 틀림없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죄입니다.
인간의 의로움과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자비’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회개하면서
하느님께 자비를 간청할 뿐입니다.>
[출처] 사순 제3주간 토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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