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15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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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09 최원석 [wsjesus] 스크랩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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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빛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
[말씀]
■ 제1독서(1사무 16,1.6-7.10-13ㄱ)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이었던 사울은 권력에 취하여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나머지 버림을 받아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며, 그 자리를 사람들로부터 별 관심을 받지 못하던 이사이 집안의 막내 다윗이 차지합니다.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 이스라엘 백성의 빛으로 찬란히 빛날 것입니다. 공정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릴 다윗은, 훗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거나 상징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 제2독서(에페 5,8-14)
성령의 빛을 받아 빛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모두 ‘빛 안에 사는’ 존재들, 주위의 사물이나 현상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춤으로써 어떤 것이 참된 가치를 지닌 것인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판별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또한 이 세상의 어두운 구석들, 거짓으로 위장된 것들을 밝혀내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당신의 빛을 나누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에서 죽어 새 세상을 지향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 복음(요한 9,1-41)
오늘 복음에서 복음저자 요한은 눈먼 사람의 치유 이야기를 전하는 가운데,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자세를 종합해서 전해줍니다. 자기가 눈먼 사람임을 인정하고 치유를 간청하는 사람, 이 사람에게는 신앙을 통해 빛이 선사됩니다. 그러나 치유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눈먼 이웃 사람의 고통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스스로 잘 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치유 받은 그 사람을 판단할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결국 치유의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까지 판단하는 사람들입니다. 치유가 도대체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새김]
학식이 출중한 사람 또는 남을 이끄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을 가리켜 흔히 ‘빛과 같은 존재’라고 치켜세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빛은 사람들이 쉽게 분별해 낼 수 있다고 믿는 곳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신망애(信望愛), 곧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참된 가치가 빛을 발하는 곳에서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의 빛은 어떤 세속적인 학식이나 능력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빛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발산되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이, 또는 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이 빛과는 오히려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눈먼 사람과 같은 존재들일 뿐입니다. 이 빛은 세속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때로는 무시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발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빛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이 빛 앞에 자신은 눈먼 사람과 같은 존재임을 의식하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비로소 빛이 주어질 것입니다.
사순시기는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 그 가운데서도 세례성사 때 받은 빛을 되새기며 빛으로서의 삶을 다짐하고 실천에 옮기는 시기입니다. 이 빛 덕분에 우리는 모두 주위의 사물이나 현상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으며, 어떤 것이 주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인지 판별해 낼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성령의 빛으로 이 세상의 어두운 구석들, 거짓으로 위장된 것들을 밝혀내는 가운데, 밝고 참된 마음으로 어두움을 밝히고 거짓을 진실로 바꾸어나가는 데 힘쓰는, 뜻깊은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사순 제4주일
복음: 요한 9,1-41: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1. 빛과 어둠의 대립
오늘의 전례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빛과 어둠의 대립을 주제로 삼는다. 요한 복음은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라고 선언하며,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빛의 도래’로 묘사한다. 이 빛은 단순한 지식의 빛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진리의 빛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참된 빛이시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인간 자신을 이해하며,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2466항)
2. 복음의 핵심: 태생 소경의 치유와 신앙의 여정
요한 복음 9장은 태생 소경의 치유 사건을 통해 단순히 시력을 회복하는 기적이 아니라, 믿음의 눈이 열리는 여정, 즉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구원 과정을 상징한다.
1) 보지 못함과 신앙의 시작
소경은 처음부터 ‘빛’을 본 적이 없다. 이는 인간이 원죄로 인해 영적 시력을 잃은 상태를 상징한다. 그가 주님께 온 것은, 곧 믿음을 향한 첫걸음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 눈먼 사람은 인간 본성 전체를 상징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손길로만이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Tractatus in Ioannem 44,1)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으로 보내신 행위는 새 창조의 행위이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것처럼(창세 2,7), 예수께서는 새 인간, 곧 믿음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인간을 만드신다. 교리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가 시작된다. 세례로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1214항)라고 한다.
2) 실로암의 물: 세례의 상징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라.”(7절)라고 하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으로, 성부께서 파견하신 메시아, 곧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따라서 실로암의 물은 단순한 세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을 상징하는 세례의 물이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는 말한다. “그대는 실로암에 내려가 눈을 씻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내려가는 것이다. 실로암의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으로 생명을 주는 물이다.”(Catecheses Mystagogicae II,1) 세례를 통하여 인간은 눈을 뜨고 빛의 자녀가 된다.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이제는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
3) 신앙의 성장: “예수”에서 “주님”으로
치유받은 사람의 신앙은 점진적으로 성숙해 간다.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11절) ― “예수님이라는 분이” ― 인간적 인식 →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17절) ― “예언자이십니다.” ― 예언자적 인식 → “그분이 어디서 왔는지 아느냐?”(33절) ―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입니다.” ― 신앙적 확신 → 예수님을 만난 후(38절) ― “주님, 저는 믿습니다.” ― 구원의 고백이 나온다. 이 최종 고백 “주님, 저는 믿습니다.”(38절)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선언이다. 그는 단순히 시력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먼저 육의 눈을 열고, 그다음 영의 눈을 떴다. 진흙으로 바른 눈은 잠시 어두웠지만, 신앙의 눈은 영원히 빛났다.”(Tractatus in Ioannem 34,9)
4) 어둠 속의 자들: 영적 맹인의 심판
이에 반해 바리사이들은 빛을 거부한 자들, 곧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의 표상이다. 그들은 “우리는 잘 본다.”(41절)라고 주장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 세상에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39절) 이 심판은 외적인 형벌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의 자기 드러남이다. 빛을 거부하는 자는 이미 자신을 어둠 속에 두는 것이다. 교리서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인간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분은 빛으로 오셨지만, 빛을 거부하는 자는 스스로 심판을 받는다.”(678항)
3. 신앙은 ‘본다.’는 행위
그리스도교 신앙은 ‘믿는다.’는 것과 동시에 ‘본다.’는 행위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빛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믿음은 어떤 어둠 속의 시각이다. 그것은 아직 완전한 빛이 아니지만, 영원한 빛을 향한 시선이다.”(Summa Theologiae II-II, q.1, a.4 ad 3) 세례를 받은 신자는 단순히 눈을 뜬 존재가 아니라, 빛을 반사하는 존재로 세상의 빛(마태 5,14)으로 부름을 받아, 세상의 어둠에서 진리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4. 결론: 빛의 자녀로 살기
오늘 복음은 우리 각자의 영적 자화상이다. 우리는 모두 태생 소경처럼 빛을 잃은 존재로 태어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눈을 떠 하느님을 보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교한다.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그분을 드러내는 것이다.”(Homiliae in Ioannem 56,2) 사순절은 우리 각자가 빛과 어둠 사이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때이다.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어둠 속에 머무를 것인가? 우리의 응답이 구원과 심판을 가른다. 그분 안에서 눈을 뜬 이만이 참된 생명과 자유를 누릴 것이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시리라.”(에페 5,14)
이병우 신부님_"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9,3ㄴ)
'부활의 결정적 표지인 십자가!'
오늘 복음(요한9,1-41)은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제자들이 태생 소경을 두고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9,2)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9,3)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셨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분명한 이유에 대한 선포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4,18)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은 질병과 그에 따른 고통과 시련을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눈이 멀은 상태로 태어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려고 그리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심으로써 그들을 통해 하느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구원'입니다.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모습인 부활'입니다. 결정적으로 병자들만 아니라, 모두의 구원과 부활을 위해, 그것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기쁨과 자유와 해방인 부활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 표지'입니다.
십자가를 믿읍시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1-5)”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0-3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1)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머리글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9-10).”
‘눈먼 사람’의 눈을 고쳐 주신 일에 초점을 맞추면,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증언이고,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4-6).”
예수님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마태 4,16)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분이고,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원상복구하시는 분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2)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서, ‘저 사람입니까?’는,
장애인에 대한 나쁜 편견을 드러낸 말입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나쁜 편견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나쁜 편견을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라는 말씀은, 눈먼 상태로 태어나게 된 원인을 설명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런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자비가(섭리가) 작용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려고 그 사람을
눈먼 채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낮 동안’이라는 말과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을 뜻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지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빛’으로서 일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영원히 빛이신 분입니다(묵시 21,23).>
3) 30절-33절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고백이고
증언인데,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4)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에서
‘우리는 잘 본다.’ 라는 말은, “우리는 죄가 없다. 우리는
의인이다. 우리는 구원받는다.” 라고 자만심에 빠져
있는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믿고 회개해서 완전히 깨끗해진 사람들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 22,14).
<회개는,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비를(구원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먼지처럼 사라질 존재일 뿐입니다(야고 4,14).>
[출처] 사순 제4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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