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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6년 3월 18일 (수)사순 제4주간 수요일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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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17일 묵상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17일 묵상

188549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3-17

김건태 신부님_“건강해지고 싶으냐?”

 

이스라엘을 성지 순례하다 보면, 예루살렘에 이르러서는 북동쪽 모서리에 자리한 성문, (양이나 염소와 같은) 희생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이곳을 통해 들여왔다 해서 이름 붙여진 ‘양들의 문’ 또는 스테파노가 순교한 곳이라 해서 명명된 ‘스테파노 문’이라 불리는 성문에서 가까운 ‘벳자타 못’을 방문하게 됩니다. 물론 폐허 상태이기는 하나, 주랑 터로 추정되는 장소가 발견되었다는 사실로 고고학적 신빙성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벳자타 못도 못이지만, 이 못 바로 앞에 ‘성 안나 기념성당’이 세워져 있어 수많은 순례자를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벳자타 못 주위에는 많은 병자, 그리고 결정적인 시기에 병자를 그곳으로 인도할 가족이나 친지 등 간병인들이 못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일부 수사본에는 3절 끝부분과 (성경 본문에는 빠져 있는) 4절에 “그들은 못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출렁거리게 하였는데, 물이 출렁거린 다음 맨 먼저 못에 내려가는 이는 무슨 질병에 걸렸더라도 건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하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의 역사적 사실성 여부를 떠나, 예수님은 오늘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병으로 고통받으며 치유를 간절히 원하던 병자 한 사람을 눈여겨보십니다. 물이 출렁거릴 때 못 속에 뛰어들고 싶어도,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던 가련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직접 치유를 청하지 않았음에도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라는 구원의 소리를 선뜻 건네주실 정도로, 참 사정이 딱한 사람이었습니다. 구원의 소리와 함께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복잡해집니다. 분명 벳자타 못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이 병자를 보았을 것이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가족이나 지인의 치유가 우선이니, 마음뿐 도와줄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 사람이 멀쩡히 걷는 모습을 보고, 놀라워하거나 함께 기뻐해야 함에도, 오늘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이의를 제기합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요.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제정된 생명의 법, 안식일 법이 죽음의 법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 병자는 자신을 치유해주신 분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응수하지만, 정작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치유를 청해본 적도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나아가 본인도 치유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은 안식일, (안식일 법이 엄금하고 있는) 치유를 베푸시고 들것을 들고 가라고 말씀하신 분이 누구인지 병자는 비로소 찾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낫게 해주신 분을 찾아 헤매면서, 자신이 완치되었음을 더욱 깊이 느끼고 건강을 허락해 주신 그분께 오로지 감사의 마음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임을 확인하고 이 사실을 유다인들에게 알리나, 이 알림이 결국 예수님께 대한 반대와 박해를 증대시키리라는 예측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선을 행하시고도 악으로 갚음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늘 우리의 마음을 짓누릅니다. 조그마한 선행에도 큰 감사와 보답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주님은 오늘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신앙생활의 기간만큼 신앙적으로 더욱 건강한 사람, 튼튼한 사람,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주위에 정신적 또는 육체적인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하며 다가가 도움을 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더욱 주위를 살피고 조금 더 다가서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 “건강해지고 싶으냐?” 

 

오늘 복음은 벳자타 연못에서 38년 동안이나 고생한 병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고 다가가 물으신다. “건강해지고 싶으냐?”(6절) 예수님의 이 질문은 단순한 상태 확인이 아니다. 이는 병자에게 자신의 내적 의지를 깨닫게 하시려는 말씀이다. 그는 단순히 물리적 치유만을 기다렸다.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7절)라고 대답한 것은, 사실 그의 절망과 고립을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한다. “38년 된 병자는 율법에 묶여 있던 인류를 상징한다. 그는 스스로 일어나지 못했으나, 은총으로 오신 주님께서 그를 일으키신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17,2) 즉, 병자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 전체를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병을 낫게 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길을 명하셨다. “일어나라!”→새로운 생명의 은총을 주신다. “네 들것을 들라.”→과거의 무능과 죄의 상징을 이제는 지배하라는 명령이다. “걸어가라.”→은총을 받은 이로써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초대를 말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분은 단순히 고쳐 주신 것에 그치지 않고, 그에게 힘을 주시어 걸어가게 하셨다. 이는 은총이 단지 병을 고칠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도록 변화시킨다는 것을 보여 준다.”(In Ioannem Homilia 36,1)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14절) 치유된 사람을 다시 만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영혼의 치유가 육체의 치유보다 더 본질적임을 보여 준다. 성 암브로시오는 말한다. “병의 원인은 종종 죄에서 비롯된다. 주님께서는 그의 몸을 치유하시고, 영혼까지 치유하시기 위하여 죄를 멀리하라고 명하신다.”(De Poenitentia II,10,95) 육체적 치유는 잠시지만, 죄에서의 치유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 교리서도 이 복음을 깊이 해석한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은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분 안에서 다가왔음을 드러내는 표징이다.”(547항)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실 뿐 아니라, 은총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부르신다.”(1996항 참조) 

 

우리도 종종 “들것에 누워 있는 자”와 같다. 나를 얽매는 죄, 무력감, 낙담 속에서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신다. “일어나라.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8절) 사순절은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은총의 시간이다. 과거의 들것에 눌려 있지 말고, 그 들것을 지고 주님을 따라 걸어가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제가 은총 안에서 다시 일어나 걷게 하소서. 더 이상 죄의 들것에 눌려 있지 않고, 당신의 말씀을 따라 사랑의 길을 걷게 하소서.”

 

 

이병우 신부님_제목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3.17)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5,6ㄴ)

 

'생명수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자!'

 

오늘 복음(요한5,1-16)은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벳자타 못'이라는 곳으로 많은 병자들이 모여옵니다.

이유는 못의 물이 출렁거릴 때, 그 못으로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속설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요한5,7)라는 그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중환자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5,6ㄴ)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5,8)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5,14)

 

'영육의 건강이 화두'입니다.

모든 면에서 지금이 예전보다 풍요롭고 편리한 세상이지만, 영육의 건강을 외치는 사람, 아픈 사람은 더 늘어만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육이 건강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영도 무너집니다. 그러니 육이 건강해야 합니다.

육이 건강하려면 영이 건강해야 합니다. 영(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데에서 육의 건강도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물'은 '생명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는 '생명수'이십니다.

우리의 영을 살리고 육을 살리는 '생명수 그 자체'이십니다.

 

생명수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 '교만과 탐욕과 시기 질투와 같은 육의 열매들'을 내려놓읍시다!

그래서 영과 육이 다시 건강해지게 합시다!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보았노라. 알렐루야.

그 물이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이 구원되어 노래하리라. 알렐루야!"(성가67번/에제47,1-9.12 참조)

 

이병우 루카 신부

 

송영진 신부님_<‘기적’은 ‘물’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옵니다.>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요한 5,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요한 5,8-9).”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14-16).”

 

 

 

1) ‘벳자타 못’의 물이 출렁거릴 때 맨 먼저 못에 내려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다 치유되었다는 말이 전해지기는

 

하는데,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실제로 그런 기적이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

 

아마도 일종의 ‘민간 신앙’이었거나, ‘미신’ 같은 일이었거나,

 

또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간절한 심정’에서

 

비롯된 어떤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2)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이고, ‘치유의 은총’은 ‘벳자타 못의 물’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온다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그 병자를 고쳐 주실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벳자타 못의 물’이나, 다른 무엇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말씀의 힘’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39.41)”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 병을 고쳐 주시고,

 

자연을 제압하신 것은, 당신이 하느님과 같은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어떤 백인대장’은 바로 그 믿음을

 

최초로 고백한 사람입니다.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8.10)”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 말씀의 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힘’은 안 믿고 ‘물’이라든지

 

어떤 물건 같은 것만 믿는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3) ‘벳자타 못 가’에 누워 있었던 병자들이 많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한 사람만’ 고쳐 주셨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 사람이 가장

 

딱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그 병자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 그래서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치유의 은총을 받은 그 병자도 예수님을 몰랐고,

 

몰랐으니까 안 믿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은총을 받은 뒤에도 예수님을 안 믿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도 은총이 내린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그는 예수님께 감사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감사드리기는커녕 예수님을 신고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배은망덕’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아마도 건강을 되찾았다는 기쁨보다 안식일을 어긴 죄로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안식일을 안 지킨 죄는 사형죄입니다(탈출 31,14).

 

그 병자는 사형을 당하는 것보다 병든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에게 당신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데, 구원을 향해 나아가라는 당부는 하셨습니다.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라는 말씀은, 그의 ‘몸의 병’이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더 나쁜 일’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면서 구원을 향해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요한 14,6).

 

그 병자가 나중에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면

 

구원받았겠지만,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난 뒤에 그것으로

 

끝났다면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랬다면, ‘몸의 병’이 치유되고 건강을 되찾은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치유의 은총’을, 병자 자신이

 

‘헛일’로 만든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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