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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6년 3월 26일 (목)사순 제5주간 목요일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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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20일 묵

188603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3-20

김건태 신부님_알고 있다고 믿는 예수님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을 믿음에 있어 어려운 점들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그분을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그분이 태어나신 장소그분의 부모와 친지그분이 사시고 활동하셨던 장소그분이 생각하고 표현하셨던 방법 등 인간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처럼예수님 시대의 동향 사람들도 그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서는 덧붙입니다: “메시아가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이의제기에 응답하십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이처럼 믿음에는어느 정도까지는 몰라도완전하게 접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신비의 영역이 존재합니다물론 우리는 인간적이며 신적인 예수님의 이 이중 영역을 이성으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믿는데그분에게 온전한 믿음을 드리는데왜 이렇게 더디고 변덕스러운지틈이 날 때마다 회피하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믿음을 말할 때이성과 지성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동시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을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다는 믿음에 빠져 있으면서예수님의 동향 사람들처럼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영역 이외에 신비의 영역을 등한시하고 있지는 않은지예수님의 세속적인 초라한 기원이 가로막고 있는 그분의 신적인 기원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예수님의 참된 기원은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께 있음을 분명하게 보고 고백해야 합니다예수님은 분명히 나는 그분을 안다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이 말씀은 당신의 기원을 밝히심과 아울러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당신 자신이심을당신이 바로 그분의 말씀 자체이신 분임을 천명하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우리는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서예수님이 남겨주신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습니다예수님이 들려주신 말씀과 보여주신 행적이 말씀과 행적을 전해준 사도들과 목격 증인들의 열정적 선포끝내 이를 기록으로 남긴 복음 저자들의 위대한 신앙에 더욱 다가서도록 노력할 때인 사순시기입니다.

 

 

오늘 하루예수님 말씀과 행적 안에서 하느님을 가까이 만나 뵙고우리의 이웃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 안에서 하느님을 조금이라도 더 느낄 수 있도록 애쓰는거룩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사건을 전한다이 축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살던 시절을 기념하는 절기였으며하느님의 구원과 보호를 기억하는 중요한 전례적 순간이었다그런데 바로 그때영원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성전에 나타나셨다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적대와 위협을 아시면서도 담대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러나 복음은 분명히 말한다“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30여기서 ‘때’(kairos)는 단순히 인간이 정하는 시간이 아니라아버지께서 정하신 구원의 때를 뜻한다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그리고 부활은 우연히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아버지의 구원 계획 안에서 성취되는 하느님의 시간이었다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이렇게 묵상한다“예수님은 원하시지 않으면 붙잡히지 않으셨고원하시지 않으면 고통당하지 않으셨다.(In Ioannem, Tract. 31,2) 예수님의 수난은 강제로 당한 것이 아니라아버지의 뜻에 따른 자발적인 순종의 사건이었다.

 

군중은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27)라고 말한다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적 출신(나자렛가족마을 공동체)만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분의 신적 기원곧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은 보지 못했다예수님은 단호하게 선언하신다“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28여기서 드러나는 것은참된 믿음이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앎이라는 것이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그리스도를 인간적 관점에서만 아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우리는 그분이 어디서 오셨는지도 알아야 한다.(Hom. in Ioannem 48,1)

 

군중은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지만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다왜냐하면아직 그분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이 장면은 우리에게도 묻는다나는 예수님을 단지 역사적 인물이나훌륭한 스승으로만 알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성자나를 위해 죽음과 부활의 길을 걸으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가 진정한 신앙은 단순히 “예수님이 어디 출신인지 안다.”는 수준이 아니라그분이 누구신지를 믿고내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시간아버지의 뜻 안에서만 움직이셨다군중의 오해와 위협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신 이유는당신의 때를 아버지께만 맡기셨기 때문이다사순 시기를 지내는 우리는내 뜻이 아니라아버지의 시간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인간적 지식이 아니라인격적 관계 안에서 예수님을 아는 믿음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내 삶 속에서 따르는 용기를 청해야 한다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너희는 그분을 참으로 알고 있느냐


이병우 신부님_"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7,30ㄴ)


'너를 위해 죽는 밀알이 되자!'


오늘 복음(요한7,1-2.10.25-30)의 제목은 '초막절에 가르치시다.'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3대 축제 중에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예루살렘에 모여서 지내는 큰 3대 축제가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유월절 후 50일에 지내면서 봄 작물의 수확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오순절'과 농업적으로는 수확이 끝난 것을 표시하고,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초막절'이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시기의 막바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2주 후면 사순시기가 향해 있었고 가리키고 있었던 '주님부활대축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복음으로 요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제베대오의 아들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도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던 제자입니다. 때문에 요한 복음은 이 사랑 체험이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입니다. 그 완전하고도 극진한 사랑의 표지가 바로 '십자가'이고, '사순시기는 이 사랑을 기억하며 묵상하는 시기이며, 이 사랑에 동참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또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기적들을 행하셨는데, 이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곧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향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7,30)


예수님은 죽으러 오신 분,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 나무에 달리러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우리도 너를 위해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송영진 신부님_<그냥 ‘아는 것’ 말고, ‘참 지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25-30).”


 


1) 바오로 사도는 ‘참 지식’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참 지식’이라는 말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고,


믿고, 삶으로 실행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참 지식’에 도달하려면 ‘참 지식’이 아닌 지식들과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7-11).”


여기서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싶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고 싶다.” 라는 뜻입니다.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싶다.” 라는 뜻입니다.


<부활과 고난에 동참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동참하기를 희망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바오로 사도가 사용한 ‘알다.’ 라는 말은


‘일치’와 ‘참여’를 뜻하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참 지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함께 걷고,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단순히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을 많이 쌓는 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라는 말은, “우리는 저 사람이 나자렛 출신이며


목수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저 사람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를 나자렛 출신 목수로만 알고


있지만, 그것은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이신 예수님’의 가문이나 출신지나 직업을 아는 것과


그분이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라는 것을 아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예수님의 가문이나 출신지나 직업을 아는 것은


구원받는 일과는 상관없는, 인간 세상의 지식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라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해 주는 ‘참 지식’입니다.


또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라는 것을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그것을 믿어야 하고,


그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참 지식’이 제대로 ‘참 지식’이 되려면, ‘아는 것’과


‘믿는 것’과 ‘사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3)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내가 내


마음대로 메시아라고 자처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는, “나를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신데”이고, 이 말씀은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너희는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실행하지 않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으면, 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면, 하느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라는 말씀은, “나는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다.” 라는 뜻이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4)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면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요한 17,3).


신앙인이 성경을 공부하고 교리를 공부하는 것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더 잘 믿고 예수님과 더


깊이 ‘일치’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교리를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처] 사순 제4주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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