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게시판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자) 2026년 3월 24일 (화)사순 제5주간 화요일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가톨릭마당

sub_menu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23일 묵상

188659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3-23

김건태 신부님_세상의 빛

 

오늘 복음에서복음저자 요한은 예수님이 바리사이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의 역사적 사실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예외적으로 말씀하신 장소를 특정합니다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곁에서 하신 말씀이다. 성전이라는 공개적인 장소를 넘어그 장소에 놓여 있던 헌금함을 언급합니다. ‘헌금함은 직역하면 귀중품 창고로서성전에는 귀중품을 보관하는 방이 있었지만이곳은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이 장소에서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벌였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따라서 성전의 첫 공간으로서이름하여 여인들의 뜰에 설치되어 있던문자 그대로의 헌금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마르 12,41-43 참조).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하는 말씀으로 바리사이들과 대화실은 언제나 그러하듯 논쟁을 벌이기 시작하십니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성경에서 은 생명과 구원축복과 희망을 가리키며, ‘어둠은 죽음과 좌절불행과 저주를 상징합니다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예수님은 말씀과 행적으로 제자들은 물론 많은 이를 당신 곁으로 불러 모으십니다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다짐하면서십자가를 통하여 성부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을 ’ 자체로 알아보고 고백합니다다시 말해서예수님은 성부 곁에서 누리는 참 생명으로 인도해 주는 길을 밝히고또 그 길을 걸어가게 해주는 빛이심을 믿어 고백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빛을 향한 마음으로 빛을 밝히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특별히 사람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러하며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바리사이들입니다빛이 아니라 어둠 속을 걷는 사람들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향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이들은 당신이 이심을 증언하신 예수님께 그 증언의 유효성에 이의를 제기합니다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빛을 보지 못했거나보고서도 애써 외면하기 일쑤였던 사람들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또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빛에 관한 증언이 유효함을 역설하십니다. “당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따라 두 사람의 증언은 유효하다.” 하는 잣대를 적용한다고 하더라도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오히려 증언의 유효성에 강도를 더할 뿐입니다성부에게서 오셨다가 성부께 돌아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한 증언만을 내놓는 바리사이들은 이러한 인식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그러니 그들이 기껏 다시 내놓는 질문이라는 것이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소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소” 하는 이 질문에, ‘성부 아버님은 늘 성자 아드님과 함께하고 계심을 믿어 고백합니다예수님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당신이 성부와 항상 함께하고 계신 분이심을당신이 바로 성부께로 이끄는 길이며 그 길을 밝히는 빛이심을 증명하셨으며우리는 그 증언에 우리의 믿음을 내걸고 살아갑니다빛이 밝히는 길을 따라 걸어가면거기에 생명과 구원축복과 희망이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하루어둠의 요소가 우리를 가로막고 때로 짓누른다고 하더라도우리에게는 빛이신 주님이 늘 함께하고 계시다는 믿음으로 힘차게 걸어가는 하루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처럼 빛이 되어주는 구원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세상의 빛”(12절)이라고 선포하신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지침이나 깨달음을 주는 스승의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만이 줄 수 있는 생명의 빛을 주신다는 선언이다. 성 아타나시오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버지께서 빛이시듯, 아들도 빛이시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 된다.”(Contra Arianos II, 18) 따라서 예수님은 단순히 유다인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의 빛이시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12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따른다.”라는 말은 단순히 외적으로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믿고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삶을 본받고,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다.”(Homiliae in Ioannem 53,1) 즉,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 안의 어둠(죄, 무지, 이기심)을 몰아내는 삶이다. 
 
바리사이들은 “당신의 증언은 유효하지 않소.”(13절)라며 예수님의 자기 증언을 거부한다. 그들은 인간적 기준, 율법적 형식만으로 판단하였고,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오는 내적 빛을 보지 못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지적하며 말한다. “그들은 눈앞의 태양을 보면서도 여전히 눈을 감은 자들이었다. 참 빛을 거부한 자들은 그들의 어둠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36,4) 오늘날 우리도 신앙을 단지 인간적 기준, 세속적 이성으로만 재단한다면 바리사이와 다르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관하여 증언하신다.”(18절)라고 말씀하신다. 즉, 그분의 말씀과 행적은 곧, 아버지의 증언이며,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적 계시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아버지를 아는 길이며,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하느님과의 친교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사순 시기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다. 우리가 회개와 기도를 통해 주님의 빛을 받아들이면, 우리 안의 어둠은 사라지고, 우리는 “빛의 자녀”(에페 5,8)로 새롭게 태어난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권고한다. “사람이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일 때, 그는 빛 안에서 살게 되고, 하느님을 닮아가게 된다. 빛을 거부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멸망으로 몰아넣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 20, 2) 예수님은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이시다.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우리도 이 빛 앞에 눈을 열고, 죄와 무지의 어둠을 버리며,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때 우리는 진정 부활의 새 아침, 빛의 충만함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_너를 단죄해서는 안 되는 이유!' 

 
오늘 복음(요한8,1-11)은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요한8,4)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시다가,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 가운데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7ㄴ) 예수님께서는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을까?
그들은 왜 떠나갔을까?
왜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을까? 
 
예수님께서 땅에 쓰신 것은 그들의 죄를 쓰지 않았을까? 그래서 죄가 많은 나이든 자들부터 떠나가지 않았을까? 
 
어느 어머님은 말합니다. "사는 게 죄여!"
살면서 더 나아지고,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자리에서 더 예수님을 닮아져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자조 섞인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7,1.3) 
 
죄인이 죄인을 심판할 수 없고, 단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너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고,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삶의 자리에서 너를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맙시다! 그리고 죄짓지 맙시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8,11ㄴ) 

 

송영진 신부님_<‘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1)”


 


1) 이 이야기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아버지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죄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 가르침들을 좀 더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시청각 교육’ 같은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여자를 단죄하지 않으신 일은,


율법 대신 사랑을 ‘선택’하신 일이 아니라,


‘구원’이 당신의 본래 사명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사명과 신원을 생각하면,


‘선택’이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입니다. 예수님도 사랑이신 분입니다.


그러니 선택이 아니라 원래 그런 분입니다.


만일에 그 현장에 성모님이 계셨다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성모님께서 돌을 던지셨을까?


‘성모님만’ 죄 없으신 분이니, 돌을 던져야 한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사람은 성모님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모님은 돌을 던지실 분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성모님이 돌을 던지신다는 것은


정말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성모님은 사랑과 자비만 가득하신 분이니,


그것은 성모님께는 선택 사항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3)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말씀을, 그 여자도 들었습니다.


그 여자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너의 죄를


너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 너 스스로 자신에게


돌을 던져라.”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사람들이 너에게 돌을 던진다면, 저항하지 말고


감수하여라.(그냥 죽어라.)”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든 여자는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두 가지 모두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반자 유다를 회개시키려고(살리려고)


끝까지 애를 쓰신 분입니다.


그러니 죄인에게 “너 스스로 자신에게 돌을 던져라.”,


즉 “자살하여라.” 라고 말씀하실 분이 아닙니다.


<배반자 유다가 자기 죄를 뉘우치고 자살한 것은(마태 27,5)


‘예수님의 뜻’을 거스른 ‘큰 죄’를 지은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너에게 돌을 던지면 감수하고 그냥


죽어라.”도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라는 말씀은,


사실은 “돌을 던지지 마라.” 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신앙인에게는 남을 단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남을 용서할 의무만 있습니다.


그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사제의 경우, 고해성사를 보겠다는 사람에게


고해성사를 줄 의무만 있고, 거부할 권한은 없습니다.


그것 또한 선택 사항이 아니라 사제의 본분입니다.>


 


4)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라는 말씀은, ‘무죄 선고’가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입니다.


여자가 회개를 했는지 안 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은데,


회개를 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예수님의 말씀은


‘기회’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새 인생을 살 기회.


여자가 회개하고 ‘새 인생’을 산다면 구원받겠지만, 만일에


회개하지 않고 다시 죄를 짓는다면, 집행유예 되었던


벌까지 합해져서 가중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출처] 사순 제5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71 0

추천  1 반대  0 신고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